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76화 (76/83)

제 76화 - 궐에 이는 바람 (6)

" 어서 고르지 않고 뭣하고 있는 것이냐."

설매가 쉽사리 고르지 못하고 주저하자 윤이 옆에서 채근하며 물었다.

" 설마 모르는 것이냐?"

설매의 두 눈은 가락지를 훑느라 정신이 없었다.

청옥, 홍옥, 흑옥, 백옥, 황옥...

대체 어느 것이란 말이냐. 그렇게 속으로 무엇을 집어야 할지 갈등하던 중 유난히 커보이는 청옥 가락지가 눈에 들어왔다. 여인의 것이라 하기엔 큰 굵기.

' 여인의 것 치고는 유난히 크다. 그렇다면 사내의 것인데... 허면 저것이 전하의 가락지로구나! 저 가락지와 같은 색과 모양의 작은 크기의 가락지를 찾으면!'

뇌리를 스치고 간 생각에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시탁 위의 다른 가락지들을 둘러보며 작은 크기의 청옥 가락지를 찾았다.

" 이것입니다! 이 청옥 가락지가 바로 신첩의 것이옵니다!'

설매는 윤의 안색을 살폈다. 살짝 놀란 듯한 임금의 용안을 보니 자신이 제대로 짚은 듯 했다.

" 내금위장, 그리고 대사성. 그대들은 과인의 친우들이니 나와 폐비 강씨가 나누어 낀 가락지를 잘 알고 있을 터. 과인이 이 가락지를 고르는데 그대들이 곁에서 더 애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말해보라. 폐비 강씨의 가락지 색이 무슨 색이냐?"

" 붉은 색이옵니다."

" 홍옥이옵니다."

시운과 영후가 차례로 답하였다.

' 어찌...청옥이 아닌 것이야!! 내가 이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였구나!!'

아차 싶었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내금위장과 대사성, 두 사람에게서 같은 대답이 나오자 설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이까지 따닥 거리며 덜덜 떨었다.

" 그렇다. 과인의 것은 청옥, 폐비 강씨의 것은 홍옥이다. 그러나 그대가 고른 것은 청옥. 이것은 그대가 폐비 강씨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니 그러하냐?"

윤이 자신의 청옥 가락지를 함께 뒤섞어 설매의 앞에 내놓은 것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분명 서로를 은애하는 사내와 여인이 가락지를 나누어 낀 것이라면 은연중에 그것이 같은 색이라 생각하기 쉽상일 터. 윤은 그 허를 찌르기 위해 일부러 덫을 놓았고 설매는 그 덫에 걸린 것이었다.

" 저...전하..."

" 좌의정과 단주가 너를 사주한 자가 맞느냐?"

" ..."

눈물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그 꿈은 덧없는 욕심으로 변질되어 제 목을 조르고 있었다.

" 저 여인이 실토할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 예!"

" 저리 비켜라!!! 나는 전하의 승은을 입은 여인이다!!! 네까짓 것들이 감히 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설매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나무 주릿대 두개가 설매의 다리 사이에 차례대로 끼워졌다. 영후는 점복과 노모를 추국장 밖으로 내보내어 설매의 처참한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 아아아아아악!!!!!"

뼈가 아스러지는 고통에 설매가 비명을 질렀다. 이를 멀리서 들은 점복과 노모는 흠칫하며 추국장쪽을 바라보았지만 영후의 재촉에 눈물을 흘리며 궐문을 나서야했다.

" 너는 누구냐. 어찌하여 좌의정과 단주와 손을 잡고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인 것이냐!!"

" ...하악...하아...저..전하.."

"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다시 주리를 틀어라!"

" 아...안돼...하아아아아아아아악!!!!"

주릿대가 양옆으로 휘어질수록 설매의 비명 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렇게 몇 번의 고초를 겪고 나자 설매의 입에서 힘없이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제 이름은 조...만덕. 좌의정 영감과 파사국 상단의... 단주의 사주를 받은 자입니다."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은 설매의 눈가에 한줄기의 애환이 흘러내렸다.

그 때도 지금과 같이 살이 에릴만큼 추운 날이었다.

만덕 역시 폐비 강씨와 비슷한 풍채와 머리칼을 가졌다는 이유로 궐에 들어와 하룻밤의 승은을 입고 다른 여인들처럼 궐 밖으로 내보내졌다. 이 모든 것은 '평생 먹고 살 만한 재물'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역병으로 아비와 막내 동생을 한꺼번에 잃고, 자신의 손에 남겨진 동생은 자그마치 여섯이나 되었다. 설상가상 역병에서 살아남은 어미는 눈이 멀어 장님이 되어버리는 통에 모든 것이 한 순간 제손에 짐이 되어 남겨졌다. 하루 끼니도 삯 바느질을 통해 근근이 연명해가는 삶이 너무도 벅차고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궐에서 상궁마마님이 나와 임금을 섬길 여인을 물색한다는 것을 귀동냥하게 되었고 가난이 지긋했던 설매는 하루살이 같은 임금의 하룻밤의 여인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지 보름이 되고, 달포가 지나고, 계절이 두 어번 바뀌어도 궐에서 내어준다던 재물은 오지 않았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받지 못한 재물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물어보았지만 관아에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모든 걸 체념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곱게 기녀복을 차려입은 기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 높은 분이 네년을 보자신다. 순순히 따라오거라."

기생을 따라간 곳엔 피부색이 검은 사내가 앉아있었다.

" 흠..."

사내는 커다란 그림을 손에 쥔 채 만덕의 온 몸을 훑어보며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 네년이 평생 먹고 살 만한 음식과 재물을 갖고 싶으냐."

" ... 그런 것을 어찌 물으십니까."

" 내겐 네년의 그 꿈을 이뤄줄 힘이 있다. 그러나 나 역시 꿈이 있다. 만약 네가 나를 도와 내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나는 널 이 나라 최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줄 것이다. 어떠냐. 나와 함께 하겠느냐?"

나랏님도 자신을 취하고 외면하는 마당에 만덕에게 더 이상 기댈 곳은 없었다. 그리하여 만덕은 그 사내와 손을 잡고 말았다.

사내에 의해 얼굴을 바꾸게 되었고 이것이 폐비 강씨의 얼굴임을 훗날 좌의정을 만나게 되며 알게 되었다.

" 참으로 똑같군."

" 그리 만드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만덕을 파사국 단주에게로 안내했던 기생의 도움을 받아 만덕은 유월관의 기생이 되어 '설매'란 이름으로 기적에 이름을 올렸고 기방에 드나드는 다른 이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좌의정이 설매의 화초머리를 올리는 것처럼 만들어 설매가 보통 기생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좌의정과 단주에 의해 설매는 사대부가의 여인처럼 행동하는 법, 말하는 법, 궐의 내명부의 법도를 익혔고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을 때 궐에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평생 먹고 살 재물을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시작한 일. 당장이라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가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임금을 마주하였을때 자신을 안을 때 거칠고 차가웠던 임금이 자신의 바뀐 얼굴을 보고 흔들리는 것을 보자 욕심이 났다. 넘볼 수 없는 자리임에도 갖고싶었다. 한낱 부질없는 꿈인 줄 알면서도 자신이 가진 무기로 임금의 옆자리를 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가졌다.

설매는 가뿐 숨을 내쉬는 숨결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도 떨쳐냈다.

" 죄인 조만덕은 내일 묘시(卯詩 오전 5시-7시), 오우분시(五牛分屍)에 처한다. 그때까지 옥에 가두어라."

윤은 차가운 눈길로 설매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곤 그 눈길을 거두어 좌의정과 단주에게 시선을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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