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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궁궐의 봄-74화 (74/83)

제 74화 - 궐에 이는 바람 (4)

그 시각, 서화는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소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서화의 시선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소혜는 그저 부끄러운 한 떨기의 꽃처럼 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 그 동안, 참으로 잘하였다. 정말 장한 일을 하였어."

" 이 모든 것이 중전마마의 하해와 같은 보살핌과 은혜 덕분이옵니다."

" 내가 네게 준 것은 차 한 잔이 전부이거늘."

" 중전마마의 고귀하신 마음을 그 한 잔에 함께 담아 내어 주셨으니, 그보다 더 값진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 네가 그 동안 애쓴 노고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크게 치하하실 것이다."

" 그러한 것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 그러나 모든 일엔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니겠느냐. 이토록 수고스러운 일을 해주었으니 응당 그에 걸맞는 것을 받아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곧 기별을 넣을 것이니 이만 물러가 기다리고 있거라."

" 예, 중전마마."

소혜가 물러가고, 서화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비단 보따리 위에 손을 올려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늘 그리워해야만 했던 지아비를 곧 마음껏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서화의 마음은 겉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 드디어 아버님께 네 존재를 알릴 수 있게 되었구나, 아가.'

자신의 회임을 그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윤에게 한시라도 빨리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다소 약하게 뛰던 맥도 제법 활기차졌다는 어의의 말에 더욱 얼굴이 환해진 서화였다.

" 중전마마."

한 상궁이 문 밖에서 서화를 불렀다. 그러자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 ... 알겠네. 지금 나갈터이니 채비하게."

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단 보따리를 꿀단지 모시듯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

" 저...전하!!!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설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던히 애썼으나 끊임없이 목소리와 뒤섞여 나오는 떨림은 감출 길이 없었다.

"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오?"

" 신첩은...모르는 일이옵니다. 정녕 모르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설매는 이 다섯 명의 사내와 대화를 나눈 적도, 만난 적도 없는, 다시 말해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 이곳은 과인이 친히 추국청을 열 때 사용하는 곳이오. 그대와 그대의 아비, 그리고 성완군을 신문할 때 역시 이곳에서 추국청을 열었지. 다시 말해, 이곳은 그대에게도 과인에게도 전혀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오."

" ...!"

아뿔싸. 설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 이 여인을 끌고 나가라!"

" 예, 전하."

어디선가 내금위장이 나타나더니 억센 손길로 설매를 전각 밖으로 끌어내어 추국장으로 끌고가다시피했다.

" 전하...!!!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땅에 주저앉은 설매가 울먹이며 윤을 쳐다보았다. 그의 옆엔 시운과 영후 또한 살벌한 표정으로 설매를 쳐다보고 있었다.

" 모든 것을 순순히 실토한다면 저 자리에 앉는 것은 면하게 해주겠다. 너는 누구냐."

온 몸이 후들거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보려 했지만 이미 머릿속은 마비가 되어 새하얗기만 했다.

" 저...전하... 신첩이 너무 오랜 궐 나들이에 기억이 흐려진 듯 하옵니다. 신첩, 전하께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시기에 기억이 흐릿해졌음에도 전하의 기분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기억한다 거짓을 고하였나이다."

이 상황에선 차라리 자신의 기억이 헷갈렸다며, 임금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기억한다 거짓을 고하였다고 하는 것이 백 번 목숨을 구하는 길이었다.

폐비 강씨의 얼굴을 한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임금이 절대 알아차릴 수는 없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 허면, 그대가 정녕 폐비 강씨이렷다?"

" 그러하옵니다, 전하."

" 내금위장. 죄인들을 데려와라."

" 예!!"

그리고 곧, 시운이 데려온 죄인들의 얼굴은 본 설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좌의정. 그대는 이 사내를 아는가."

" 전하! 소신은 모르는 이옵니다!"

모르쇠로 나오는 좌의정에게서 시선을 돌린 윤이 또 다른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 허면 그대는, 옆에 있는 사내를 아는가."

" ..."

" 조선말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과인의 묻는 말에 답하라. 그대의 옆에 있는 사내를 아는가."

" ..모르옵니다."

두 죄인의 답에 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과인이 가지고 있는 증좌에 의하면 좌의정과 파사국 상단의 단주는 참으로 친밀하거늘. 어찌 두 사람은 똑같이 모른다 하는 것인가. 과인을 능멸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윤의 얼굴은 차갑게 식었다.

" 소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는 소신을 모함하기 위한 무리들의 음모이옵니다, 전하!"

좌의정이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때였다.

" 중전마마, 납시오!!!"

서화가 비단 보따리를 손수 양손으로 받쳐들고 추국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윤은 재빨리 걸어가더니 서화의 몸을 돌려 추국장에 등을 지게 만들었다.

" 전하? 어찌 그러십니까?"

" 안에는 중전께서 보실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오. 상궁을 통해 보내면 된다 하였건만, 어찌 직접 걸음하신 것이오?"

" 하오나 중한 것이 아닙니까. 차마 다른 이의 손에 맡길 수 없었기에 신첩이 직접 들고 온 것입니다."

" 안은 들여다 보지 않는 것이 나을 듯 하오. 교태전으로 돌아가 계시오. 오늘은 긴 밤이 될 듯 하니 일이 갈무리 되는 대로 교태전으로 가겠소."

" 예, 전하."

잠시 본 것만으로도 족했다. 의금부에서 추국청을 열어도 될 것을 임금께서 직접 신문하는 것엔 그만한 연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서화는 살짝 미소를 짓고선 애틋한 마음을 뒤로한 채 걸음을 교태전으로 돌렸다.

서화가 자리를 뜨는 것을 확인한 윤은 다시 추국장으로 돌아와 좌의정과 단주의 앞에 보따리를 보여주며 물었다.

"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하지 않느냐?"

" ..."

" ..."

" 대사성. 매듭을 풀어 안에 든 것을 꺼내라."

" 예, 전하."

매듭이 풀리고 안에서 두 권의 서책이 나왔다.

" 그대들은 정녕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냐?"

서책을 본 단주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고 말았다. 자신이 너무도 잘 아는 크기와 모양.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이 서책 안엔, 파사국 상단 단주의 부조리한 헌납 내용이 들어있다. 그런데 매우 익숙한 이름 하나가 자주 등장하더군. 그것이 누구인지 혹 그대는 아는가, 좌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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