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화 - 궐에 이는 바람 (1)
" 먼 곳이라."
단주는 세르샤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먼 곳... 왜 먼 곳이라 하였을까.
그 장부가 조선 밖을 떠났을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이 조선 땅에서 가장 먼 곳은 어디...
" 옳거니!"
단주에게 먼 곳이라함은...
" 궁궐이로구나."
임금이 살고 있는 궐이 분명했다. 언제 그 장부가 궐 안까지 흘러들어갔는진 알 수 없으나 장부는 그곳에 있음에 확신이 섰다.
이미 조국에서도 버림받은 그에게 더 이상 정착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조선 땅에서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방인. 그렇다면 권력이라도 손에 쥐는 것이 제 신변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터였다.
" 이리 죽나, 저리 죽나 인간사 언젠가 죽게 되는 것은 매한가지. 그렇다면 화려하게 제 몸을 태우다 죽는 장작같은 삶이 낫지 않겠는가."
단주는 은밀히 상단의 믿을만한 사람을 불러 미리 종이에 써둔 글을 보여주었다.
[ 무예에 출중하고 민첩하며 돈이라면 껌뻑 죽는 자 다섯 만 물색하여 찾아내라.]
재상놈이 항시 제 주위를 맴돌며 감시를 하고 있을 것이니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글이라면 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든 단주는 뒷장의 종이를 보여주었다.
[ 찾아내거든, 내게 오지 말고 그 사람들을 모두 궐로 보내 장부를 찾으라 해라. 장부는 파사국어로 쓰여있으니 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찾아오면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 돈을 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 전해라. 또한 이 상단을 주시하고 있는 눈들이 사방에 깔려있으니 은밀히 행동해야 한다. ]
궐로 사람을 보내 장부를 되찾아올 생각이었다.
' 반드시 이 치욕은 갚아주겠다, 쳐죽일 세르샤 이 놈!'
***
그 시각, 윤은 영후에게서 온 서찰을 막 읽은 참이었다.
" 임 상선, 대사성이 언제 또 다시 입궐한다 언질 하던가?"
" 내일 다시 온다 하였습니다, 전하."
주강을 마치고 돌아오니 임 상선이 서찰 하나를 올리며 영후가 다녀갔다 전하였다.
[ 맺을 결 (結)]
서찰 안에 쓰여있는 글 전부였다.
' 드디어 끝을 보는 것인가.'
곧 궐에 피바람이 불 것이었다. 이렇다 저렇다 하여도 모두 자신의 백성. 귀하게 여기는 백성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뜨러지려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모든 공신들이 입궐하기 훨씬 이른 시각, 윤이 소셋물을 들여 얼굴을 닦아냈을 무렵 대사성 민영후가 알현을 청하였다.
" 네놈은 잠도 없는 것이냐. 하기사, 얼른 장가를 들어야 어여쁜 색시를 품 안에 조금이라도 더 품으려 게으름을 필진데 아직 짝이 없으니 이리..."
" 소신이 보고싶어 밤잠까지 설치시며 일찌감치 기침하신 것은 전하 아니십니까?"
윤의 농에 영후 또한 농으로 맞받아치며 웃었다.
" 임금의 말을 중간부터 잘라먹는 것을 숨 쉬듯 하는 불경한 신하를 이리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는 과인은 참으로 훌륭한 성군이 아닌가."
" 성군은 성신 (誠臣: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신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올런지요."
" 성신이라함은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 그야... 당연히 소신이 아니겠습니까?"
" 네 두꺼운 면(面)엔 당해낼 수가 없구나."
영후의 말에 윤이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 어제 서찰은 받아보았다. 그리고 불에 태워버렸느니."
사뭇 진지한 얼굴로 윤이 말했다.
" 잘 하셨습니다."
" 모든 것이 다 준비가 된 것이냐?"
" 예. 허나 시작은 이쪽이 아닌 상대쪽에서 할 것입니다."
" 어찌하여?"
영후는 목소리를 낮춘 채 윤의 귀에 속삭이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 좋다. 허면 우리는 어찌 준비하는 것이 좋겠느냐?"
윤과 영후는 그 후로 한참을 은밀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계획을 세웠다.
***
서화는 얼마 전 인경이 눈물을 쏟으며 털어놓은 이야기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이미 마음을 내어준 사내가 있다던 인경은 죽어서도 살아서도 그이뿐이라 했다.
' ... 헌데 그 분을 입궁하고 나서야 다시 뵈었어.'
서화를 기함하게 한 인경의 말.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 사내가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 전하의... 호위무사...'
내금위장 홍시운 영감이라. 인경의 사정은 너무도 안타까웠지만 그렇다하여 자신이 두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내명부의 수장이라는 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그간 무수히 많은 속앓이를 하며 끙끙 앓았을 인경을 생각하니 서화 자신의 마음까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인경과 내금위장이 궐 안에서 몇 번이나 부딪혔다 들었다. 그럼에도 임금의 후궁신분인 자신은 말 한마디 걸고 싶어도, 손을 뻗어 붙잡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며 어린아이처럼 제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던 인경의 모습.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린 탓에 서화는 그저 같이 마음아파하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 중전마마, 판관 김영조의 누이, 김소혜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 아... 들라 하게."
연분홍 치마에 옥색 당의를 입은 여인이 말간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서화에게 절을 올렸다.
" 옥색 당의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이 보기 좋구나."
" 그리 어여쁘게 봐주시니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중전마마."
" 어제 하던 것을 계속 이어 할 준비를 해놓았다. 지금 바로 하겠느냐, 아님 나와 차 한 잔 마신 뒤에 하겠느냐?"
" 중전마마께서 주시는 차 한 잔은 마음을 온화하게 하는 힘이 있사옵니다. 그리 귀한 차는 아껴두었다 퇴궐하기 전 마셔도 되올런지요."
소혜의 말에 서화는 빙긋 웃으며 말하였다.
" 차라면 얼마든지 여러 번 내어줄 수 있으니 언제든 말하거라."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얼마전부터 교태전에 드나드는 소혜가 서화는 마음에 썩 들었다. 그의 오라비인 김영조 또한 심성이 강직하고 총명함이 이루 말할 데 없다 들었다. 그이의 누이동생 소혜 또한 말귀가 빠르고 관직에 있는 신료들 못지 않게 뛰어난 학식, 거기다 온화한 성정까지. 자신에게 남자 형제가 있었다면 짝을 지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 한 상궁. 들여오게."
서화의 부름에 한 상궁이 커다란 시탁(쟁반)에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 나는 서책을 읽을 것이니 여기에 없는 사람이다 여기고 편하게 하여라."
" 예."
소혜는 소맷단을 걷어붙이더니 무언가를 빈 서책에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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