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화 - 최후통첩
칠흙같이 어두운 밤.
자말은 그림자를 벗삼아 지붕을 타고 동명골 안으로 몰래 잠입했다.
그 시각, 동명골 고규태는 몸을 좌우로 흔들 거리며 글을 읽고 있었다.
"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하게 판단하고, 충실히 실처..."
그러나 곧, 고규태는 자신의 목에 닿은 차가운 느낌의 물체에 읽던 것을 멈춰야 했다.
" 바른대로 대라. 장부는 어디에다 숨겼느냐."
' 조선 사람이 아니군.'
인기척은 숨길 수 있으나 그 사람에게서 나는 사향 냄새까진 감출 수 없었다.
" 무슨 장부를 예 와서 찾는 것인가."
" 시치미 뗄 생각 마라. 입 함부로 놀리다간 그대의 모가지가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 이 비루한 한 목숨 앗아간다 누구 하나 눈 깜빡일 듯 성 싶으냐. 벨 테면 베어라."
" 네 놈이 정말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구나. 정녕 장부를 내놓지 않을 생각인 것이냐?"
" 없는 것을 어찌 내놓는단 말이냐?"
" 오냐. 그리 죽고 싶다면 내 죽여주지."
자말이 칼을 높이 쳐들어 아래로 내리치는 순간 고규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탕!!
병풍 뒤에 숨어있던 세르샤가 재빨리 칼집으로 자말의 칼을 막아냈다.
' ...! 인기척을 못 느꼈는데...!'
페르시아 최고의 무인으로 손꼽히는 자말이었다. 그런 그도 감쪽같이 속을 만큼의 실력이라니. 쉽게 얕 볼 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검을 제대로 고쳐쥐었다.
" 단주의 생각과는 달리 이곳에는 그 장부가 없다."
" !!!"
세르샤의 말에 자말이 움찔거렸다.
" 지금 여기서 그 칼을 거둔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 나더러 네게 목숨을 구걸하라는 뜻이냐?"
" 굳이 피를 보고 싶진 않다."
" 무인에게 검은 목숨과도 같은 것. 그럴 수 없다."
" 어리석은 자로군. 아쉽구나. 너의 이 출중한 실력을 훨씬 더 좋은 곳에 쓸 수 있음에도 단주의 졸개노릇을 하며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꼴이라니."
굳이 살생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자말을 살려둔다면 그는 자신을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위협이 될 자였다.
" 이얍!!"
자말이 틈을 노리며 세르샤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세르샤에겐 칼보다 더 빠른 것이 있었으니.
" 윽..!"
독이 든 표창을 목에 맞은 자말이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신음을 흘렸다.
" 맹독이니 저승길 가는데 그리 힘들진 않을 것이다."
세르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말은 숨을 헐떡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휘몰아치던 몸부림이 잔잔해졌다.
" 괜찮으십니까. 다친곳은..."
세르샤가 고규태의 목을 쳐다보며 물었다.
" 괜찮네. 헌데 자네, 표창도 다룰 줄 알았던 겐가."
검을 쓰는 자들은 쉽게 보았으나 표창같은 무기를 쓰는 이를 본 것은 처음이었던 고규태가 놀랍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 파사국은 이곳보다 궁중암투가 더욱 치열한 곳이지요. 그런 곳에서 허리춤에 자리만 크게 차지하는 검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표창같은 작은 무기가 손에 익히기도, 빠르게 다루기에도 수월합니다."
" ...그렇군."
" 이 자의 시신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훈장님께서도 오늘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 알겠네."
그저 중전마마와의 인연으로 동명골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했던 이방인의 사내에게 이런 실력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고규태는 그저 세르샤가 하는 말에 따르겠노라며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등에 굵은 한 줄기의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
동이 틀 무렵,
세르샤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르샨과 함께 자말의 시신을 수습하여 상단으로 데려왔다.
" 이 시신은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 단주는 아직 방에 있느냐?"
" 예."
***
" 으음.."
날이 밝아오는 것을 느낀 단주는 몸을 뒤척거리더니 이내 눈을 떴다.
" 으악!! 네 놈이 언제부터 여기에 앉아있었느냐?"
눈을 뜨자마자 단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말이었다.
" ..."
" 왜 아무말도 않는 것이야? 장부는!! 장부는 찾아온 것이겠지?! 생각보다 시일이 적게 걸렸구나! 잘하였다!!"
" ..."
단주의 말에도 자말은 그저 단주를 응시할 뿐, 아무 대꾸가 없자 단주가 자말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어디 다친 게야?"
툭.
그러자 자말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단주가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자말의 목에 가져다대었다. 한참을 대고 있어도 그의 손가락에 느껴지는 울림은 없었다.
그제서야 죽었음을 확인한 단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감히 누가 이런 짓을!!!"
" 내가 하였소."
아직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라 어슴푸레한 방 구석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세르샤가 단주의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 이...이...!!!"
" 다시 한 번, 동명골에 사람을 보낸다면 그 땐 단주의 목이 나가 떨어질 줄 아시오."
" 네 놈이 내 장부를 가져간 것을 다 알고 있다. 어서 내 놓아라!!!"
" 이미 내 손을 떠났소. 떠났어도 한 참 전에 떠나 먼 곳까지 가 있지."
" 왜 자꾸 내 일에 훼방을 놓는 것이냐? 좌의정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 상단은 크나큰 이익을 챙길 수 있고 그것은 곧 우리 파사국이 부강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아둔한 놈!! 더 이상 끼어들지 마라!!!"
" 당신은 이미 파사국에서 버린 사람이오. 그걸 잊었소?"
" ...!"
" 마지막 경고요.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내 직접 그대의 목을 거두겠소. 아, 그리고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단주 그대는 내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그럼 이 자의 시신은 그대가 직접 처리하시오. 단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람이니."
상대가 악일지라도 '살생'의 행위는 세르샤에게 무척 괴로운 것이었다. 단주를 상시 염탐하라 했던 덕분에 그의 심복이 동명골로 가리란 것을 사전에 알 수 있었고 훈장의 목숨도 구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일시적일 뿐, 탐욕이 흘러넘치는 단주가 자신의 경고를 한다 하여 멈출 이가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단주가 부디 자신의 경고를 새겨들어 다른 선택을 내리기를, 해서 자신이 또 다른 이의 목숨을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 앗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랬다.
그러나 단주는 세르샤의 바램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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