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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궁궐의 봄-69화 (69/83)

제 69화 - ... 있습니다.

상단으로 되돌아온 단주는 그날 밤, 누군가를 은밀히 불렀다.

" 부르셨습니까, 단주 어른."

자말. 그는 단주의 심복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늘 뒤에서 해결해주는 해결사와 같은 존재였다.

" 네가 새로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 여부가 있겠습니까."

" 찾아주어야 할 장부가 있다. 그리고 그 장부가 있는 곳에 낱장으로 되어 접혀있는 종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찾아 다시 내게 갖다주어야 한다."

" 그 장부가 어디 있는지 짐작가는 곳이 있으십니까."

" 그간 재상놈의 눈초리가 수상하여 몰래 그의 행보를 뒤쫓도록 사람을 심어놓았다. 듣자하니 동명골이라는 곳에 자주 드나든다 하니 그곳을 뒤져보면 무언가 나오지 않겠느냐. 만일 그곳에서 찾지 못하거든 그놈의 뒤를 쫓아라. 허면 꼬리가 밟히겠지."

" 분부 받들겠습니다."

" 또한 거슬리는 자가 있다면 죽여도 좋다. 그러니 반드시 찾아 내게 가져와다오."

사내는 순식간에 작은 소리 하나 없이 사라졌다. 미처 꽉 닫히지 못한 문짝이 흔들거리는 모습만이 누군가 방을 나섰음을 알려주었다.

***

비밀리에 설매를 뒤쫓도록 붙인 이에게서 마침내 희소식이 들려왔다. 건네받은 서찰엔 설매가 나이가 열둘 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에게 주변을 살피며 돈을 쥐어주고는 다신 찾아오지 말라며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냈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 드디어!!"

영후는 지리에 밝은 시운을 대동하여 함께 그 여자아이가 살고 있다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은 도성 외곽에 있는 빈민촌으로 몇 해 전, 역병이 돈 이후 쑥대밭이 되었다.

" 정말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냐?"

" 서찰에 의하면 이곳에서 점복이를 찾으라 하였으니 맞겠지."

언뜻 보아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지는 이곳의 사람들과 마주친 순간, 그들의 동공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절망'은 시운과 영후의 숨을 턱 막히게 하였다.

" 이곳에 점복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소?"

" 점복이? 눈밑에 왕점이 있는 저 개울가 옆의 집 둘째를 말하는 것 같은디 한 번 그리 가보시유."

개울가에서 빨래를 마치고 오던 아낙이 허름한 집 한 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영후와 시운은 고단한 다리를 이끌고 아낙이 가리킨 집으로 갔다. 조촐한 크기의 마당에는 어린 아이들이 줄맞추어 놀이를 하고 있었고 부엌에서 눈 밑에 엽전만한 점이 있는 앳된 여인이 손을 털며 나왔다.

" 그대가 점복이 맞소?"

" 제가 점복입니다. 헌데 누구십니까?"

앳된 여인, 아니, 여인이라 하기엔 설익은 풋내가 났다. 큰 점을 가진 소녀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영후와 시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 잠시 물어볼 것이 있소. 잠시 들어가도 되겠소?"

" ..."

" 그저 몇가지 물어보기만 할 것이니 그리 겁먹지 마시오. 허니 안으로 안내해 주겠소?"

아낙들이 커다란 빨랫짐을 머리에 이고 지나가면서 점복이와 자신들을 쳐다보는 것이 신경쓰인 영후가 조심스레 물었다. 점복이 역시 말많은 아낙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 불편했는지 별다른 군말없이 영후와 시운을 안으로 안내했다.

" 점복아. 어째 바깥이 부산스럽구나."

방 안엔 중년의 여인이 자리보전을 한 채 누워있었다.

" 양반님들이 잠시 물어볼 것이 있다며 찾아오셨어요, 어머니. 제 어머니께서는 앞이 보이지 않으십니다. 다른 곳으로 모시고 싶으나 방 한 칸이 전부인지라... 누추하여 송구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점복의 행동에서 의젓함이 묻어났다.

" 높은 양반 나으리들께서 어찌 이 험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 유월관의 기녀, 설매를 아시오?"

" 우리 만덕이를 아십니까?"

되려 시운과 영후에게 질문을 한 이는 다름아닌 자리에 누워있던 여인이었다.

" 설매가 기적에 오르기 전의 이름이 만덕이오?"

" 예. 찰 만(滿)에 덕 덕(悳), 제 서방님이 아이가 태어나고 몇날 며칠을 고민하여 지은 이름입니다. 헌데 어찌 양반님들께서 우리 만덕이를 찾으시는지요?"

" 설매의 얼굴이 기녀가 되고 나서 다른 사람처럼 바뀌진 않았소?"

영후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여인은 깜짝 놀라며 팔을 뻗어 점복이의 팔을 잡고 물었다.

" 예? 점복아, 지금 이것이 무슨 말이냐?"

" ..."

점복은 입술만 질겅질겅 깨문채 아무말이 없었다.

" 우리 만덕이 얼굴이 바뀌었다니... 그것이 정말입니까? 점복아, 이 분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참말이냐?"

" 실토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이 집안의 모두를 의금부로 끌고 갈 수도 있소."

보다 못한 시운이 점복이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 ..."

" 정녕 문초를 당해야 입을 열 것인가 보군. 내 이들을 당장 추포하여!!!"

" ...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끝내 점복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 무엇을?"

영후가 물었다.

" 기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였습니다. 헌데 자신의 과거는 짐만 될 뿐이니... 앞으로 잊고 살 것이라며 제게도 본인의 존재를 잊어버리라 하였습니다. 또한 그 누가 찾아와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 허면 어떠한 연유로 얼굴을 바꾸게 되었는지 아시오?"

" 그것까진 모릅니다. 어느 날, 먹을 것을 구해오겠다며 집을 나섰고 그 뒤로 연락이 끊겨 변고를 당한 줄 알았습니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어린 아이를 통해 돈을 보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듣자하니 그 여인이 언니의 시중을 드는 아이라 하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거듭 청을 하여 유월관 담벼락에서 언니를 만났고 그 때 처음으로 언니의 얼굴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말입니다."

시운과 영후가 서로 잠시 눈을 마주쳤다.

" 얼마 전, 설매를 만난 것을 알고 있소. 자신을 잊으라 말한 사람을 다시 찾아간 것은 무엇이오?"

" 그것은... 제 어머니가 고열에 시달리는 바람에 급히 의원을 모셔오느라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쓰고 말았습니다.  저 마당에 있는 아이들이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그만..."

' 그래서 돈을 구하러 설매를 찾으러 갔다 혼이 난 것이로군.'

" 헌데 만덕 언니에 대해 어찌 물으시는 겁니까...? 혹 제 언니가 양반나으리들께 죽을 죄를 지은 것입니까?"

점복이의 눈엔 벌써부터 잔뜩 눈물이 글썽였다.

" 그것은 아니오."

설매, 아니 만덕이란 여인이 작금 짓고 있는 죄는 죽어 마땅하나 이 아픈 어미와 아이들에겐 잘못이 없었다. 제 언니가 무슨 큰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이 안쓰러워 영후와 시운은 차마 그렇다 말 할 수 없었다.

" 하나 물어볼 것이 있소. 설매가 만덕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혹, 있소?"

" ... 예. 있습니다."

중년의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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