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화 - 인과응보
" 이것이... 인과응보라는 것인가."
윤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서안 위를 손톱으로 톡, 톡 치며 탄식 섞인 말을 내뱉었다.
"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신이 여러 번 확인해 보았으나..."
" 대사성 그대가 송구하다 할 것은 없지 않느냐. 다 이 모든 것이 과인의 불찰인 것을."
윤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영후는 유월관에 가 설매의 벗이라는 기녀에게서 무엇이든 알아내보려 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렇기에 마지막의 실가닥 같은 희망을 가지고 설매에게 사람을 붙여 그녀가 혹 식솔들을 만나지는 않는지 은밀히 감시하라 해둔 채 기약없는 기다림을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임금의 승은을 입은 여인들이 너무 많아 의심가는 자들을 추리는 것조차 힘들다는 영후의 말에 윤의 얼굴엔 근심이 드리웠다.
설을 대신할 여인을 궐 안에 들여 품에 안았던 지난 날들. 법도대로라면 승은을 입은 여인은 승은 상궁의 첩지를 내려야 함이 마땅하나 윤은 이들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어하지도, 승은을 입은 여인들을 궐 안에 두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기에 모두 평생 먹고 살 만한 재물을 주어 궐 밖으로 내보내곤 하였다.
그리움에 눈이 멀어, 과거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미련하게 현재까지 끌고 와버린 자신의 잘못에 깊은 탄식이 끊임없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 이 모든 일의 원흉이 과인이로군."
"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전하. 그 기생 모르게 사람을 붙여두었으니 필시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 그리 위로해주어 고맙구나."
" 그리고 전하, 이것은 파사국 재상이 가지고 온 장부이옵니다. 그 안엔 좌의정과 파사국 상단의 단주가 왕래하며 주고받은 물품의 종류와 규모가 상세히 적혀있사옵니다."
" 파사국 언어로 쓰여있구나. 대사성은 어찌 이 내용을 안 것인가?"
" 떠돌이 시절, 명국에서 만난 파사국 상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과인에겐 읽기 어려운 글자구나. 사역원에 일러 이 장부를 번역토록 하라."
" 예, 전하. 그리고 이것을..."
영후가 조심스레 접혀있는 종이를 두손으로 윤에게 내밀었다.
" 이것이 무엇이냐?"
" 파사국 상단의 단주가 좌의정에게 최 귀인을 중전으로 만들기 위해 공신들을 포섭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고 최 귀인이 교태전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파사국 단주에게 향유와 상아의 전매권 보장과 금난전권을 포함한 육의전(국가에 필요한 물건을 납품하며 여섯개의 물품을 독점으로 판매하는 상인)을 모두 통째로 넘기겠다는 계약서이옵니다."
" 뭐라?"
윤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한데로 모아졌다.
" 소신의 미천한 생각으로는 지금의 중전마마를 몰아내고 최 귀인을 중전으로 만들려는 좌의정의 음모인 듯 하옵니다. 그렇다면 기생 설매는 좌의정과 파사국 단주가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말일 것입니다."
" 고얀 놈들!!!"
윤의 목소리에 들끓는 분노가 서려있었다.
" 내 반드시 이 사단의 진상을 샅샅이 파헤칠 것이다!"
한편, 파사국 상단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연회에서 돌아온 어젯밤, 단주는 자신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 거렸으나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모든 물건은 있어야 할 제자리에 빠짐없이 있었다.
유월관에서 이미 술을 잔뜩 마신 단주는 자신이 취해 그런 것일 거라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장부를 보관하는 책장 주변에 침입자의 여부를 알기 위해 몰래 뿌려둔 하얀 가루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이...!!!"
단주는 허겁지겁 책장을 민 뒤 바닥에서 함을 꺼내어 열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안에 있어야 할 물건이 사라졌음을 알아채곤 절규했다.
' 대체 어느 놈이냐! 나를 물 먹이려는 좌의정이냐, 아니면 눈엣가시같은 재상놈이냐!'
좌의정과 자신이 지금 당장은 한 배를 탄 처지라고는 하나 능구렁이 같은 좌의정이라면 언제든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단주는 서둘러 좌의정에게 향했다.
***
"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제 장부를 가져가신 것이 좌의정 영감이십니까?"
단주가 다짜고짜 좌의정에게 물었다.
" 무슨 장부를 말하는 것인가."
" ..."
범인은 좌의정이 아닌 것인가. 그의 눈빛에 거짓이 담겨있지 않았다.
" 무슨 장부인지 내 묻질 않는가."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어 좌의정이 단주가 언급한 장부가 무엇인지를 재차 캐물었다.
" ... 장사치들에겐 목숨줄과도 같은 장부이지요."
그제서야 자신의 언행이 경솔했음을 알아차렸으나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단주가 체념한 듯 답하였다. 그러자 눈치가 백단인 좌의정은 그 장부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곤 단주를 몰아세웠다.
" 자네! 설마 나와 교류한 내역들을 장부 안에 적은 것인가?"
" 장사를 하는 이라면 마땅히 하는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또한 타지에서 온 이방인인 제가 제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기 위해선 만일을 위한 차선책을 마련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주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 자네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겐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장부 따위를 만들다니! 그것이 만일 전하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우린 죽은 목숨일세! 몸 건사는 커녕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야!"
" ..."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입이 열개,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단주였다. 그러나 곧, 무언가 생각난 듯 단주가 말하였다.
" 너무 염려하시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좌의정 영감. 장부는 모두 파사국의 언어로 쓰여있기 때문에 아마 내용을 알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좌의정이 기가 찬 듯 대꾸하였다.
" 자네가 조선의 언어로 우리와 대화를 나눈다 하여 조선 사람들을 바보 천치로 아는 것인가? 이 나라엔 사역원이라는 곳이 있네. 언어를 익힘에 있어 출중한 자들이 모인 곳으로 그 곳에서라면 어느 나라의 언어든 풀이가 가능하단 말일세."
" ..."
" 허면 우리가 하나씩 나누어가진 계약서는 무사한 것인가? 설마 그것 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단주의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그마저도 무사치 못하다는 것을 안 좌의정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 대체 이 사단을 어찌 수습할겐가!"
좌의정이 역정을 냈다. 그의 목엔 여러개의 시뻘건 핏줄이 곤두섰다.
" ... 다시 가져와야지요."
세르샤, 이놈을!!! 목을 부러뜨려도 시원찮을 놈!!!
감히 나를 골탕먹이려 들어?
단주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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