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화 - 밀명을 따라서 (2)
" 전하."
궐로 돌아온 시운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윤을 찾았다.
" 왔느냐."
" 예. 폐비 강씨가 사가에 있을 적 곁에서 시중을 들던 여종을 찾았습니다."
" 수고하였다."
" 전하께서 분부하신 대로 안전한 곳으로 은밀하게 여종과 식솔의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여종이 전하께 이것을 전해달라 하였습니다."
시운이 소맷자락에서 꺼낸 것은 서찰이 담긴 하얀 봉투였다.
윤은 이를 받아 고이 접어져 있는 종이를 펼쳤다.
그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글자들을 천천히 내려읽어가기 시작한 윤. 그러나 곧 그의 안색은 복잡 미묘한 듯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 전하. 어찌 용안이 평안해 보이지 않으신 겁니까? 혹 무슨 문제가..."
" 너도 읽어보거라."
윤이 서찰을 시운에게 건넸다. 이에 잠시 망설이던 시운은 어서 받으라는 윤의 손짓에 조심히 서찰을 받아들어 펼쳤다. 그리고 시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에 묘한 표정이 감돌았다.
" 다 읽었느냐."
" 전하, 이것은..."
서찰 안엔 그토록 윤이 알고 싶어했던 진실이 담겨있었다.
[ 전하. 이 서찰을 읽고 계신다면 신첩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겠지요.
늦었지만, 이제서야 진실을 고하고자 하옵니다.
처음 입궐하던 날, 우연히 지나가시는 전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첩은 전하의 여인이 되었지요.
하오나 제겐, 입궐하기 전부터 마음에 품은 정인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전하의 이복 동생이신 성완군이십니다.
그 분을 잊어보려... 전하를 은애하려 하였습니다. 허나 어찌 사람 마음이 인력(人力)으로 바뀔 수 있을런지요.
비록 전하와 부부지연을 맺었으나, 신첩이 이를 먼저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지키고 싶은 어미의 몹쓸 모정으로
전하께 거짓을 고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태전을 나서는 이 순간까지도 그 분 걱정뿐인 못난 신첩을 부디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하오나 부디, 전하의 아우이신 성완군만큼은 용서해주시길 감히 청하나이다.
부디 수복강녕하시옵소서.]
" ...그래, 폐비 강씨가 나에게 남긴 서찰이다."
이상하게도 자신을 사랑하려 해도 그리할 수 없었다던 폐비 강씨의 고백이 가슴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다는 깊은 슬픔에 유배지에서 홀로 쓸쓸히 자결했을 그이를 생각하니 측은하고 애달팠다.
하늘에서라도 맺어지고픈 바램이 서로에게 닿았던 것일까. 폐비 강씨가 자결하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윤의 이복동생인 성완군 또한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 하오면 그 때 폐비 강씨가 회임했던 용종은..."
" 성완군의 핏줄인게지."
윤이 시운의 말을 가로챘다.
" 지금이라도 이 서찰을 전하께서 읽으실 수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 네 말이 맞다. 이 서찰이 폐비 강씨 행세를 하는 그 극악무도한 여인과 배후를 처단하는데 요긴하게 쓰일 것이니, 과인이 폐비 강씨에게 큰 빚을 졌구나."
서찰엔 폐비 강씨가 쓴 것임을 증명하는 그녀의 어보가 찍혀있었다. 이를 보아 이 서찰은 폐비 강씨가 교태전에서 쫓겨나기 이전에 쓰인 듯 했다.
' 그대는 이미 이리 될 본인의 운명을 직감했던 것인가.'
한참을 무언가 생각하던 윤이 시운을 불렀다.
" 시운아."
" 예, 전하."
" 네가 해주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 하명하시옵소서."
" 성완군과 폐비 강씨가 묻힌 곳을 찾아 묘를 합장하여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어라."
' 그대들의 사랑을... 짐작조차 못한 과인의 무지함을 용서하라.'
성완군과 폐비 강씨가 서로 연모하는 사이였더라면... 윤은 처녀간택에서 그녀를 절대 뽑지 않았을 것이다. 성완군과 어미는 달랐어도 윤이 무척이나 아끼는 아우였기에 그가 폐비 강씨를 달라 했다면, 윤은 폐비 강씨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있었어도 성완군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성완군도, 폐비 강씨도 윤의 백성이었다. 살아 생전 이루지 못한 이들의 사랑을 이제나마 이뤄주려함이었다.
***
한편, 영후는 임금의 시침을 들었던 여인들을 찾아 삼만리 중이었다.
" 우리 전하, 참으로 많이도 품으셨구나."
임 상선을 밑에서 따르는 어린 내시를 어르고 겁박하여 겨우 손에 넣은 여인들의 인적장부.
그 두께가 중지 손가락 두 마디는 되는 듯 하였다.
" 이를 보고 그 기생을 어찌 찾아낸단 말이냐."
탄식하던 영후가 원망스러운 눈길로 장부를 쳐다보았다.
" ... 이럴 것이 아니라 유월관에라도 가보아야겠군."
기방의 기생들 중, 설매의 고향을 아는 이가 있다면, 그 고향을 중점으로 찾아내면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릴 터였다.
영후는 다소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
" 서화야. 이것 좀 보아."
" 이게 무어야?"
인경이 수줍게 서화의 앞에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 풀어보면 알어."
매듭을 풀자 하얀 배냇저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이것은..."
" 아기씨를 위해 틈틈히 지은 거야."
" 인경아."
" 시침방 나인들이 이보다 더 좋게 만들어 올릴테지만 네 벗으로, 네 친정어머니를 대신해 온 정성을 다해 만들었어. 솜씨는 어수룩해서 모양새가 그리 어여쁘진 않지만..."
꾸러미 안에는 작은 버선 한 켤레도 들어있었다.
인경은 혼자서 쓸쓸히 교태전에 있을 서화가 안타까워 걸음을 자주하였다. 서화의 회임 사실을 안 뒤론, 사가의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여 산모에게 좋은 음식을 가져와 입덧이 심한 서화의 앞에 대령하곤 하였다.
서화 역시 인경의 이러한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하면서도 같은 임금의 여인인 처지에 자신 먼저 아이를 가진 것이 못내 미안해졌다.
" 미안해."
느닷없는 서화의 사과에 인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 갑자기 무엇이 미안하다 하는 것이야?"
" 내가 먼저 이리 되어버려서... 네 부모님께선 네 회임만을 오매불망 바라실진데..."
그제서야 인경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서화에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미소를 머금은 인경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 그리 말할 것 없어. 사실은..."
조심스럽게 운을 뗀 인경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경청하던 서화.
이윽고 그녀의 눈엔 놀라움과 걱정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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