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화 - 밀명을 따라서 (1)
" 아르샨. 단주가 장부를 보관하고 있는 곳은 알아내었느냐."
" 예, 세르샤님. 그간 단주의 동태를 살펴본 바로는 단주의 방 안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여러 날을 단주의 꼬리처럼 몰래 뒤쫓아다닌 아르샨이 확신에 찬 듯 말했다.
" 어찌 확실할 수 있는 것이냐?"
" 단주를 만나기 위해 명국의 상인들이 방문할때면 그들의 손에 언제나 묵직해보이는 보따리가 손에 들려있었습니다. 헌데 희한한 것이 그 보따리가 명국 상인들이 떠나고 단주가 자리를 비워도 단주의 방에서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요. 필시 단주가 방 안 어딘가에 숨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럴 듯 하구나."
" 헌데 말입니다, 세르샤님."
" ...?"
" 단주가 좌의정과 결탁하여 서로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이를 뒷받침할 비밀 장부가 실로 존재할까요?"
" 그럴 것이다. 단주라면 그러고도 남을 이지. 아마 제 목숨줄을 위해 비밀 장부보다 더한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 하오면 언제 단주의 방을 수색하는 것이 좋을까요?"
" 일단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로 둘만 준비해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입이 천금보다 무거운 자여야 한다."
" 알겠습니다."
" 모레, 유시 (酉時, 오후 5시-7시). 유월관에서 김석필 객주가 연회를 연다고 한다. "
" 김석필? 그가 누구입니까?"
" 그 자는 우리 파사국 상단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이전까지 파사국의 물품을 받아 조선에 있는 명국의 상단에게 건네던 중계자다. 지금은 파사국에서 물품을 받아 그의 객주에서 직접 파는 것은 물론 육의전의 시전상인들과 각지에서 온 보부상에게 조달하며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자다. 아마 그 연회에 단주도 갈 것이다. 그리되면 그 때 우리가 단주의 방을 뒤져 장부를 찾는다."
세르샤의 말에 아르샨은 신이 나는지 눈빛이 빛났다.
" 알겠습니다, 세르샤님. 믿을 만한 자들로 꾸려놓겠습니다."
***
한편, 시운과 영후도 각각 받은 밀명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운은 폐비 강씨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여종을 찾아 폐허가 된 폐비 강씨의 사가를 찾았다.
끼이익.
기괴스러운 소리와 함께 힘없이 열리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폐비 강씨가 유배에 처해지고 이조판서 강이직이 참수를 당하던 날의 참상을 말해주는 듯 했다.
" ... 누구시오?"
난데없이 시운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가 팩 하고 몸을 돌렸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내는 잔뜩 취한 듯 빨간 코에 동공 풀린 눈으로 시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 그러는 그대는 누구요?"
" 나는 그저 이리 저리...히끅, 전국을 떠도는 나그네요. 차림새를 보아하니 높은 나으리 같은데 어찌 이 초라한 흉가에 걸음하셨소?"
"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 헌데 이 집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오?"
" 그리한지 꽤 오래되었다오. 히끅. 이 집의 주인들이 모두 떠나고 그 아래 있던 자들 몇몇만 겨우 남아있을 무렵 이곳에 처음 왔었지. 그 때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먹고 그랬다오. 그랬는데...히끅."
" 그랬는데?"
시운이 되묻자 고령의 사내가 툇마루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 어느새 모두 이 집을 떠나 사라졌다오. 그 뒤로 나도 길을 다시 떠났고 이후엔 한 해에 한 두어번 도성에 올 적마다 이 곳에서 쪽잠을 자고 길을 나선다오. 엽전 한닢도 아쉬운 처지라..."
" 허면 이곳에 있던 여종을 아시오?"
" 여종이 한 둘이었는 줄 아시오?"
" 폐비 강씨와 각별하였던 여종을 아시오? 그분을 가까이서 모시던 이라 하던데..."
" 아! 그렇담 홍분이를 말하는가 보오! 폐비 강씨가 유배되고 나선 매일 눈물바다였소. 헌데 그 아인 이제 이곳에 없소."
" 혹 어디로 갔는지 아시오?"
시운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 홍분이란 여인이 자신이 찾던 여종임을.
" 오래되어 세세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얼핏 듣기로는 외가 식구가 있는 저 윗마을 계동골로 간다 하였소."
여종의 이름과 사는 곳을 알게 되었으니 예상보다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 고맙소."
인사와 함께 시운이 묵직해 보이는 작은 주머니를 사내의 무릎 위에 던져주었다.
무심코 열어본 주머니 안엔 엽전이 들어있었다.
" 하나, 둘, 셋, 넷... 열 다섯! 아이고 나으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으잉? 그새 어디로 간 것이야? 그나저나 앞으로 며칠은 막걸리를 실컷 마실 수 있겠군. 히끅... 전에 홍분이 찾은 양반은 빈손으로 고맙다는 말도 않고 사라지더만 이 양반님은 인심도 좋지!"
사내는 엽전을 두번이고 세번이고 세면서 실실거렸다.
시운은 조금 전 만난 사내에게서 들은대로 홍분이가 있다는 계동골로 향했다.
" 이보시오. 말 좀 묻겠소. 이 곳에 홍분이란 여인이 살고 있소?"
" 저기 장독대 있는 초가집으로 가보시오."
시운이 길을 가던 여인에게 홍분의 거처를 묻자 여인이 손으로 허름해보이는 초가집을 가리켰다.
" 예 누구 있소?"
" 나으리는 누구십니까?"
휑한 흰 머리에 주름에 파묻힌 눈, 상체가 땅과 평행을 이룰 만큼 잔뜩 굽은 여인이 나무로 된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며 물었다.
" 이곳에 홍분이란 여인이 살고 있소?"
" 제 손녀는 무슨 연유로 찾으십니까?"
" 주상전하의 어명으로 찾아왔소. 지금 여기에 있소?"
" ... 안으로 드시지요."
시운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두운 내부에 천장에 길게 늘어뜨러져 있는 거미줄, 방 구석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 그대가... 홍분이오?"
" ..."
자신의 이름이 시운의 입에서 나오자 홍분이 더욱 자신의 무릎을 세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팔 안으로 숨겼다.
" 나는, 내금위장 홍시운이오. 내가 그대를 찾으러 온 이유는, 주상전하의 어명 때문이오."
" ... 정말 내금위장 영감이십니까?"
자신의 정체를 먼저 밝힌 시운의 말에 홍분이 고개를 빼꼼 쳐들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 그렇소. 원한다면 내 신분패를 보여줄 수도 있소."
시운이 자신의 직위를 증명하는 신분패를 홍분의 앞에 내밀어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으로 홍분이 물었다.
" 저를 찾아오신 것이 어명이라 하셨습니까. 전하께서 어인 일로 천한 저를..."
" 폐비 강씨의 초상화에 관한 일로 왔소."
" ..."
초상화란 단어에 홍분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 지금 궐에는 폐비 강씨를 사칭하는 여인이 드나들며 왕실을 기만하고 있소. 일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기 위해선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오."
시운의 말에 한 동안 아무말 없이 벽을 쳐다보고 있던 홍분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 전에 중전마마... 아니, 저희 설이 아씨의 초상화를 찾으러 온 무리가 있었습니다. 조선말이 유창한 검은 피부의 외국 사내들이었지요."
" 천천히 말하시오. 급할 것 없으니."
" 그들이 제가 사는 곳을 어찌 알았는지 다짜고짜 쳐들어오더니 아씨의 초상화를 내놓으라며 횡포를 부렸습니다. 그들의 눈빛이 너무도 살벌하여 느낌이 좋지 않아 없다 하였지요. 헌데 당장 내놓지 않으면 제 할머니를 죽이겠다며 협박하였습니다."
" ..."
" 끝까지 모른다 하였지만... 온 집을 뒤져 결국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곤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 ..."
" 그리고 저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지옥같은 흉물로 만들어버렸지요."
홍분이 초에 불을 켜 방 안을 밝힌 뒤 그것을 제 얼굴에 가까이 들이대며 말하였다.
" ...!"
홍분의 얼굴을 본 시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둠에 숨겨져 있던 홍분의 얼굴의 반쪽은 눈알이 패여 애꾸눈이 되어있었고 얼굴엔 온통 칼로 낭자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뻔 하였지요."
시운의 시선을 느낀 홍분이 자조하듯 말하였다.
" 몇 번이나 콱 죽어버릴까 생각도 하였지만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은 해야겠기에..."
자신의 처지가 저리 되었어도 홀로 남을 조모를 걱정하여 맘대로 죽지도 못한다는 홍분의 말에 시운은 섣부른 위로의 말도,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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