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화 - 여인의 야망 (2)
궐에 발을 들이면서 조선 최고의 사내이니 한 두 번의 노력으로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각오했다.
그리 각오하였건만...
설매는 작금의 상황에 되려 당황하고 말았다.
석강을 마친 임금이 침전으로 들어와 나인 행색을 하고 있는 설매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이 보름달처럼 커다래지더니 저벅저벅 걸어와 뼈가 으스러질만치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 돌아왔구려."
" ...전하?"
임금의 옥체에 감히 손을 대었다며 경을 치던 그의 이전 모습과는 달리 애잔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윤의 모습에 설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지난 번, 그대를 그리 보내고 후회하였소."
" ..."
" 과인이... 잠시 혼란스러웠던 탓에 그대를 멀리 하려 하였소."
" 전하.."
" 그대를 멀리 한 주제에 그대를 또다시 그리워하고 말았소. 헌데 이렇게 다시 돌아와주다니... 고맙소."
" 전하...!"
생각했던 것보다, 각오하였던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리게 되었구나!
임금의 가슴은 듬직하고 따뜻하였다. 조선 최고의 사내가 드디어 내게...!
설매가 일부러 물기 젖은 목소리로 윤의 등을 감싸안으며 임금에게 말했다.
" 아니옵니다, 전하. 이제라도 신첩을 이리 반겨주시니 그간의 슬픔이 모두 한 순간에 사라졌사옵니다."
설매는 임금의 품 안에서 처연하게 눈을 내리깐채 음전한 양갓집 규수처럼 수줍음있게 행동하며 말했다.
" 그리웠습니다, 전하. 전하를 도무지 잊을 수 없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전하께서 제 목숨을 거두어주시길 바라여 죽을 각오를 하고 궐에 들어왔나이다."
" 과인을 위해 돌아온 그대를 어찌 그럴 수 있겠소."
" 전하께서 신첩의 마음을 이제서야 알아주시니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설매가 눈물을 그렁이며 말끝을 흐렸다.
" 그것이 무엇이오?"
윤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기어코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떨어뜨리며 말하였다.
" 전하께서는... 지금 교태전에 있는 중전, 아니, 중전마마의 사내가 아니십니까. 저만의 사내이셨던 전하께서...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통하고 마음이 아프옵니다."
" 설... 그대의 그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과인이 어찌 하면 좋겠소?"
옷고름으로 눈가의 물기를 닦아내며 설매가 말했다.
" ... 예전처럼 전하께 안기고 싶습니다."
설매의 말에 순간 윤의 낯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경직된 얼굴을 이내 애써 지우며 윤이 웃으며 말하였다.
" 과인도 그대를 안고싶소."
" 정말이십니까?"
그럼 그렇지.
조선의 임금 또한 사내다. 모든 것에 왕성할 춘추이신 임금께서 이 육감적인 몸을 보시고 어찌 모른 척 지나가실 수 있으랴.
어느덧 설매의 얼굴엔 자신감으로 넘쳤다.
" 허면... 오늘 밤 안아주십시오. 신첩이 변함없이 전하의 것임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부디."
임금에게 안겼던 그 때의 감각이 몸 곳곳에서 다시 피어올랐다.
어서 안기고픈 마음에 설매가 옷고름을 풀어헤치려 손을 앞섬에 가져간 순간, 윤이 이를 가로막았다.
" 지금 당장이라도 그대를 이곳에서 취하고 싶으나, 그대는 과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정인이 아니오? 우선 신변을 정돈한 후, 정식 절차를 거쳐 그대의 입궁 교지를 내린 후 마음껏 그대를 안고 싶소."
" 하오나..."
" 여기서 그대를 안는다면 궐 안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물론, 대비마마와 대왕대비마마의 귀에도 흘러가게 될 것이오. 그리 된다면 그대의 입궁이 힘들어질 수 있소."
임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는 그 무엇도 아닌 먼지 한톨만도 못하다.
후궁 첩지는 커녕 궁녀의 신분도 아닌 자신이 오늘밤 임금의 성은을 입는다면 웃전 어른들이 노발대발할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입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어엿하게 임금의 여인이라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과 진배 없는 일.
비단 당의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노라니 저도 모르게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 신첩은 기생의 몸입니다. 헌데 어찌 전하께서 신첩을 궐로 불러들이실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 그대는 본래 과인의 조강지처이자 교태전의 주인이었질 않소? 과인을 보기 위해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코자 기적에 이름을 올린 것을 어찌 탓할수야 있겠소."
" 공신들과 웃전들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 잊었소? 과인은 이 나라의 주인이오."
임금의 마음이 온전히 자신에게 기울었다는 의미였다.
윤의 말을 듣자 설매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마음이 더욱 든든해졌다.
설매는 살포시 윤의 품안에 안기며 말하였다.
" 신첩, 이리 행복하여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당장 안기지 못하여 회임이 미뤄진다 한들 어떠랴.
임금이 제 사내가 되었으니 앞으로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날은 무수할 터였다.
" 전하. 하오면 신첩은 전하께서 교지를 내리실 때까지 궐 밖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임금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며 앙탈을 부리자 윤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였다.
" 과인이 기별을 넣겠소. 당분간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며 만나야 하겠지만 과인 또한 그대 없인 살 수 없으니."
이에 설매는 윤의 목을 끌어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곧 궐 안엔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폐비 강씨의 모습이 천월각은 물론, 강녕전과 경회루에 드나드는 모습을 본 나인이 한 둘이 아니며 곧 지금의 중전께서는 폐서인이 될 것이라 하였다.
또한 폐비 강씨와 임금이 서로 포옹하고 있는 것은 물론, 살갑게 손을 마주잡고 있는 것을 너도나도 보았다며 교태전의 주인이 또다시 바뀔 것이라 쑥덕거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많은 이가 목격하게 함으로써 설매의 배후에 있는 세력을 눈속임하려는 윤의 계략이었다.
어느덧 이 소문은 대비전과 대왕대비전까지 흘러들어가 결국 대왕대비 강씨가 임금을 불러들여 엄히 꾸짖기에 이르렀다.
" 주상!!! 어찌 그 사악한 폐비 강씨를 궐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오!!! 주상에겐 중궁전과 후궁도 둘이나 있질 않소!!!"
" 이 어미도 폐비 강씨가 주상의 침전을 멋대로 드나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도 황망하였소. 내 차마 교태전의 중전을 쳐다볼 면이 서질 않는단 말이오!!!"
대비 조씨도 대왕대비의 말을 거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 할마마마, 어마마마."
" 대체 이 일을 어찌 수습하려 이러시는 것이오. 폐비 강씨에게 교지라도 내려 후궁으로 들일 셈이오?"
" 소자를 믿어주십시오. 두분께서 염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른체 해주십시오. 소자가 지금 이곳에서 드린 말씀도 못 들은 척 해주십시오. 때가 되면, 자초지총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당분간은 부디 모른 척 해주십시오."
진지한 윤의 표정에 말문이 막힌 대왕대비와 대비였다.
아침부터 두 어른에게 시달린 윤이 대왕대비전에서 나와 피곤한 얼굴로 임 상선이 신겨주는 태사혜를 신으며 물었다.
" 곤전께서는 무탈하신 것이냐."
" 예, 전하. 교태전 박 상궁이 전하길, 중전마마께선 평안하시다 하옵니다."
윤이 교태전이 위치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중전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좋으련만.
허나 능구렁이같은 악의 배후를 처단하기 위해선 모든 이의 눈을 속여야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대전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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