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62화 (62/83)

제 62화 - 신첩은 전하의 사람이니까요.

" 중전!! 정신이 드오?"

" ... 여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서화를 다시 억지로 눕히며 윤이 말했다.

" 교태전이오. 중전께서 아미산을 거닐다 혼절하였소."

" ...전하께서 교태전엔 어인일로..."

어인 일이냐니.

언제부터 꼭 필요한 용무가 있어야 들를 수 있는 곳이 교태전이었던가.

서화의 말에 윤의 심장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내가 그동안 이토록 그대에게 소원하였구려..

" 지아비가 지어미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오."

윤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 ..."

" 목 마르진 않소?"

" ...마릅니다."

그러자 윤이 서화의 몸을 반쯤 일으켜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하더니 물이 든 사발을 서화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서화가 조심스레 사발을 건네받으려 하자 윤이 느닷없이 사발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더니 물을 머금은 뒤 서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 흡.."

윤이 입에서 천천히 흘려보내는 물을 서화가 천천히 받아마셨다.

" 하아..."

" 더 마시겠소?"

끄덕.

서화의 작은 끄덕임에 윤이 다시 한 번 물을 머금고선 서화의 입 안으로 넣어주었다.

목을 축인 서화가 다시 자리에 눕자 윤이 서화의 손을 꼭 맞잡으며 말했다.

" 중전."

" ...?"

" 그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면... 미안하오."

" 전하."

" 폐비 강씨의 일로 중전의 마음이 다쳤다는 것, 잘 알고 있소."

" ..."

" 그이와는... 끝이 좋지 않았기에, 과인의 감정이 갈무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폐비 강씨를 떠나보냈기 때문에 늘 잔 부스러기 같이 여기저기 흩뿌려진 미련이 남아있었소."

폐비 강씨가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제서야 후회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몰려왔다.

외면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마주하며 그이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런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것이 아니라 전체적 그림을 마주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후회가 되었다.

매듭을 짓지 못한 관계인지라 폐비 강씨를 떠나보냈어도 윤의 마음 속엔 여전히 남아있었다.

" 허나, 폐비 강씨는 더 이상 과인의 마음에 남아있지 않소."

" ...전하."

" 과인에겐 오직 중전뿐이오."

" ..."

" 얼마전 천월각에서 그이와 마주쳤었소. 일순간 과거의 감정이 몰려와 혼돈스러웠으나 모두 정리하였소."

천월각에서 윤이 여인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서화가 목격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그가 실토하듯 고백하였다.

" 짧은 방황을 뒤로하고 예까지 오는데... 너무 오래 걸려 미안하오."

" 전하."

" 헌데 지금 궐 안엔 과인과 중전을 노리고 사특한 짓을 벌이는 무리들이 있소. 이들을 색출하고 감별하기 위하기 위해선... 중전의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오."

윤이 서화의 뺨에 붙어있는 머리칼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말했다.

폐비 강씨가 정말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 일의 배후에 좌의정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도 자리에 누워있는 서화에게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 당분간은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모두 막으시오. 그 어떠한 소문에도 현혹되지 말고 과인이 어떠한 행동을 해도 악의 무리들을 추포할 때까진 이를 믿지 마시오, 절대. 그래줄 수 있겠소?"

윤이 서화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묻자 이내 서화가 나지막히 입술을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 전하를... 믿습니다. 신첩은 전하의 사람이니까요."

오늘 낮까지만 해도 하염없이 불안하기만 했던 마음이,

차갑고 시리게만 느껴지던 흘러가는 시간이,

윤의 음성에 속절없으리만큼 빠르게 안정되었다.

그제서야 안도한 서화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

" 보기좋게 박대당하였습니다. 옷가지를 다 벗어던지고 나신이 되어 임금을 유혹한 끝에 넘어오는 듯 하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잠시, 눈길도 주지 않고 나가라 하더이다. 정녕 임금이 은애하는 여인이 폐비 강씨가 맞단 말입니까?"

설매가 좌의정에게 따지듯 쏘아붙였다.

' 경박하기는. 역시 천출의 피는 폐비 강씨의 얼굴로도 못 속이는 겐가.'

좌의정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 폐비 강씨는 생전에 음전한 여인이었다. 네년처럼 이부자리에서 사내를 보자마자 환장하여 달려드는 기생짓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단 말이다."

" 폐비 강씨가 순하였다 하여 잠자리에서도 그러하단 보장은 없지요. 되려 얌전한 이가 사내와 몸을 섞을 때면 더 대담하다는 소리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설매가 입술을 씰룩였다.

" 네년이 한 짓은 과하였다. 회임은 커녕 승은도 못 입었으니 폐비 강씨의 복위를 밀어붙일 명분이 없질 않느냐."

" 열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지요. 이년을 다시 한 번 궐에 들여보내주십시오. 계속 부딪히다 보면 임금의 단단히 굳은 마음도 무너지실겝니다. 이년의 몸 또한 여러번 탐한 사내는 있어도 단 한 번만 탐한 사내는 없지요."

처음 승은을 입었을 땐 그저 스쳐지나가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얼굴을 바꾸고 다시 한 번 임금의 앞에 서게 되어 안긴순간, 임금이란 사내를 진정으로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더욱이 자신은 임금이 그토록 사랑하였다는 정인의 얼굴을 가지지 않았는가.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풍만하고 모든 사내들이 탐내는 자신의 몸으로 임금을 유혹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혹 누가 알겠는가. 자신이 지금의 중전을 몰아내고 교태전의 주인이 될지도.

폐비 강씨와 성완군의 일은 누명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폐비 강씨의 복위를 추진하고 그와 동시에 임금의 승은을 입어 회임을 하게 된다면 서화를 몰아내고 교태전 자리를 꿰차는 일은 절로 따라오는 수순이었다.

그렇게 설매가 헛된 꿈을 꾸게 만든 장본인인 좌의정은 속으로 또 다른 짓을 꾸미고 있었으니-.

설매가 회임을 하게 된다면 기생이었던 점을 들먹거리며 중전이 아닌 후궁의 첩지를 주고 자신의 딸인 최 귀인을 중전의 자리에 앉힐 심산이었다. 또한 설매야 아이를 낳기 전 독을 타 먹여 죽여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설매가 회임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었다.

' 아직은 쓸모있는 패(牌)다.'

" 좋다. 다시 한 번 궐로 들여보내줄테니 이번엔 반드시 승은을 입어야 한다. 반드시!"

좌의정의 탐욕에 젖은 눈빛이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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