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화 - 돌고 돌아...
" 보십시오, 중전마마. 패랭이 꽃이 지천에 피었습니다. 참으로 어여쁘지 않습니까?"
" 그래. 나오니 좋구나."
바깥에 나와 햇빛과 바람을 쐬어야 어미와 복중의 태아에게 모두 이롭다며 산책을 하자는 박 상궁의 아우성에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겨우 교태전 후원인 아미산으로 나온 참이었다.
" 지난 며칠 조금만 움직여도 목에 땀이 흐르더니 오늘은 신기하게도 바람이 선선합니다. 마치 중전마마께서 산책 나오시기를 기다렸던 것 처럼 말입니다."
박 상궁의 말에 서화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 중전마마.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옵소서."
곁에서 듬직하게 서화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 상궁의 말에 서화가 입을 열었다.
" 걱정말게. 무리 하지 않을 터이니."
한 상궁은 마치 친정 어미처럼, 박 상궁은 곰살맞은 여동생 같은 존재들이었다.
또한 서화가 궐에서 버티고 견딜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 참으로 어여쁘기도 하지."
만개한 꽃잎을 활짝 펴고선 은은한 향기까지 뿜어내는 패랭이꽃들 사이에 서화가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당의자락 안에 숨겨두었던 한 손을 꺼내 패랭이 꽃잎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이가 생기고 나니 평소같았다면 그저 예쁘다며 눈길만 한 번 주고 떠났을 꽃이 너무도 어여쁘게 느껴졌다.
" 중전마마. 그리 몸을 숙여 앉아계시면 아기씨께 좋지 않습니다."
박 상궁이 조용히 서화의 귓가에 속삭이자 미처 이를 인지하지 못했던 서화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려 하였다.
" 아..!"
그 순간, 몸이 크게 휘청일만큼 현기증이 나자 박 상궁이 재빨리 서화의 팔을 부축하였다.
" 중전마마! 괜찮으시옵니까?"
" 괜찮네."
" 소인이 아둔하여 옥체가 미령하신 중전마마를 억지로 나오시게 하였습니다."
" 아니야. 너무 오랜만에 햇빛을 보아 잠시 현기증이 난 듯 하네."
그렇게 박 상궁을 안심시키며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 ...읏.."
잠시 진정된 듯 하였던 현기증이 또 다시 일어나자 서화가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더니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에 모두가 아연실색하자 한 상궁이 어서 교태전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 하였다. 한 상궁의 말에 궁녀들이 서화를 박 상궁의 등에 업히도록 하려 했다.
" 멈추어라."
그러던 그 때, 붉은 곤룡포를 입은 윤이 놀란 얼굴을 한 채 빠른 걸음걸이로 다가오더니 정신을 잃은 서화를 번쩍 안아들었다.
" 어의를 불러와라. 당장!"
교태전으로 가는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자신의 두 팔 안에서 아무런 기척 없이 정신을 놓은 중전을 보고있노라니 죄책감과 미안함에 심장이 도끼로 난도질 당하는 것 같았다.
묵직함 조차 느껴지지 않는 서화의 몸. 너무도 말라버려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진 그녀의 어깨가 당의자락 너머까지 느껴졌다.
이에 윤의 눈이 근심으로 짙게 내려앉았다.
서화를 재빨리 금침 위에 눕히고 궁녀들이 옷가지와 머리장식을 모두 떼어냈다. 어의를 기다리는 그 짧은 찰나의 시간이 몇 만겁의 시간처럼 느리고 더디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어의가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교태전에 들어섰다.
" 저..전하.."
" 한시가 급하다. 어서 중전의 상태를 살펴라."
윤의 말에 어의가 서화의 손목에 묶인 실을 잡고 맥을 살폈다. 한참을 살피던 그가 실을 내려놓고선 임금에게 아뢰었다.
" 잠시 혼절을 하신 듯 하옵니다. 바깥 거동을 당분간 삼가시고 원기 회복에 집중하시면 나아지실 것이옵니다."
" 중전께서 혼절을 왜 하신 것이냐?"
윤의 물음에 어의가 난처하단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아마도 서화가 회임에 대해 함구해달라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 듯 했다.
" 그...그것이..."
" 바른대로 고하라."
" 중전마마께서는... ㅎ.."
" 전하! 감히 전하께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계속되는 윤의 추궁에 어쩔수 없이 서화의 회임을 아뢰려던 어의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아닌 박 상궁이었다.
" 무엇이냐. 고하려는 것이."
" 중전마마께서는 그간 도통 수라를 잡수시지 못하였습니다."
" 어찌하여?"
" 궐 안에 떠도는 소문 때문이옵니다."
순간 윤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필시 소문이라면 폐비 강씨의 이야기일터. 기생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바람에 아무죄 없는 중전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간 것 같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모두들 물러가라."
임금의 어명에 바깥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한 상궁이 박 상궁을 지청구하였다.
" 감히 네가 어찌 전하의 안전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 하오나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어의께서 중전마마의 회임을 고하였을게 아닙니까. 한 상궁 마마님께서 말씀하셨듯, 우리 마마께서 회임 사실을 감추려하시는 것엔 무언가 따로 생각하고 계신 의중이 있으신 것일테니 저는 그저 그것을 지켜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박 상궁의 말에 한 상궁은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
조용해진 방 안에서 윤은 죽은 듯 누워있는 서화를 바라보았다.
이 여인을 어쩌자고 이리 아프게 하였을까.
어의가 맥을 짚었던 서화의 손목을 슬며시 감싸쥐었다. 너무도 얇은 두께. 어린 아이의 손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했다.
중전을 사모한다 하였으면서. 이젠 그대만이 과인의 마음 속에 있다 하였으면서.
또 다시 아프게 하고 말았다.
다시는 상처주지 않겠다 다짐하여놓고, 또 다시 슬프게 하고 말았다.
이 여린 사람을...
또 혼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느닷없이 나타나 궐 안을 헤집어놓은 기생의 목을 당장이라도 비틀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기생탓만을 할 수는 없는 일.
폐비 강씨인 줄 알고 이에 흔들린 죄.
잠시였으나 파도처럼 밀려왔던 회한과 사무쳤던 그리움에 그 여인을 품에 안은 죄.
이 모든 것은 윤,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 미안하오..중전..."
기어코 윤의 눈에서 옥루가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그 동안 중전에게 잘못하였던 것들, 그 벌은 모두 내가 달게 받겠소.
그러니... 이렇게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지 말란 말이오.
옛 정인에게 잠시나마 마음이 흔들렸던 죄, 중전의 마음이 풀어진다면 무엇이든 하겠소.
그러니 이리... 아파하지 마시오.
죄책감과 한탄의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마침내 윤의 손 안에 있던 서화의 손목이 움찔거렸다.
" ...전...하?"
의식을 되찾은 서화가 놀란 눈으로 윤을 쳐다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