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화 - 밀명, 그리고 벗
단전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역한 기운에 박 상궁이 놀라 어의를 불러왔다. 폐비 강씨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궐 안에 파다하게 퍼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헬쓱해지고 말수가 없어진 서화를 보면서 박 상궁과 한 상궁은 여간 속을 끓인 것이 아니었다.
필시 크게 탈이 난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온 궁궐을 들썩이게 할 만한 경사소식이었다.
" 경하드리옵니다, 중전마마. 맥이 미세하게 잡히긴 하오나 회임이 틀림없사옵니다."
어의의 말에 서화의 안색만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주위를 모두 물리고 어의에게 당분간 이 일을 함구해달라 몇 번의 신신당부를 하였다.
본래대로라면 빠짐없이 임금께 고해야 마땅하지만, 서화의 불안함에 흔들리는 눈빛을 본 어의는 그리하겠다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어의가 물러가기가 무섭게 방 안으로 들어온 박 상궁과 한 상궁.
" 중전마마. 어서 주상전하와 대왕대비마마 그리고 대비마마께 이 좋은 희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아직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주게."
" 예? 하지만 왕실의 크나큰 경사가 아닙니까. 모두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이 기쁜 소식을 알리지 않으시겠다니요.."
" 박 상궁, 중전마마께서 이리 말씀하실 땐 우리같은 아랫것들이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으셔서 그런 것이니 그저 조용히 입 다물게."
한 상궁의 말에 박 상궁은 조용히 입술을 안으로 말아닫은 채 서화의 눈치를 살폈다. 열린 창문으로 바깥 하늘을 아무말 없이 내다보고 있는 서화. 한 상궁은 박 상궁의 팔을 살짝 꼬집더니 자신을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하였다.
모두가 물러가고 혼자 남겨진 서화는 비로소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 보았다.
배에 손을 슬쩍 대 보아도 아이가 그 안에 있음을 실감할 수 없었다.
' 이 시국에... 때를 잘못 맞춰 찾아왔구나, 아가.'
지금 자신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과 진배없었다.
지아비가 수 년 동안 그리워한 여인이 살아 돌아왔으니 앞으로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진 불분명했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회임 사실이 자칫하면 경사가 아닌 되레 악재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상황에 아이라니.
만약 폐비 강씨가 다시 궐로 돌아오게 된다면 이 아이는 대체 어찌되는 것일까.
전하의 핏줄이니... 궐 밖으로 나가게 되더라도 아이는 두고 갈 수 밖에 없게 되는 거겠지.
이 아이가 제대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할텐데...
앞으로 닥쳐올 불안정한 미래에 마음이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
" 전하."
" 왔느냐."
비밀 회합을 가진 뒤 며칠이 흐르고, 윤이 영후만 다시 궐로 불러들인 참이었다.
" 오늘은 너와 시운에게 따로 명할 것이 있어 불렀다."
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금위장이 당도하였음을 알리는 상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 첫 번째는, 전에 네가 말했던 폐비 강씨의 초상화 말이다."
" 예, 전하."
" 그이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었다던 그 여종을 찾아라. 그리고 때가 올 때까지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보호토록 해라."
" 분부 받들겠습니다, 전하."
" 이 일은 사람 찾아내는데 으뜸인 내금위장이 하도록 하고, 영후 네가 해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 그것이 무엇입니까?"
" 너와 파사국 재상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에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이 있었다."
" 전하의 어심을 흐트러뜨리는 그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 그 설매라는 기생이 폐비 강씨의 모습으로 천월각에 나타났던 날 밤, 궐에서 나와 단주와 좌의정을 만났다 들었다. 헌데 그들의 대담 중 그 기생이 승은을 입은 적이 있었다 하지 않았느냐? 정녕 과인이 기억하는 것이 맞느냐?"
대사성에게서도, 파사국 재상의 입에서 나온 말 모두 그 기생이 자신에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허면 여태까지 자신의 밤시중을 들었던 여인들 중 하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 예."
" 승은이라 함은 과인의 침소에 들어온 적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헌데 얼굴이 바뀌어 그 기생이 누구인지 본래의 얼굴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영후 또한 그 부분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임금께서 이에 대한 말씀이 없으시기에 혼자서 은밀히 알아보려던 차에 윤의 입에서 기생의 정체를 찾아내라는 어명을 받자 그제서야 영후가 보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 소신 또한 그것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습니다. 반드시 그 기생의 본래 출신성분과 모든 것을 샅샅이 알아내겠습니다."
" 이 모든 일의 결과는 그대들의 손에 달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예."
밀명을 받드는 두 사람의 눈빛은 차분히 내려앉았음에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
누군가가 이마 위를 따스한 손길로 짚는 것이 느껴져 눈을 번쩍 떴다.
" ... 괜찮은 거야? 악몽이라도 꾸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흔들어 깨우려던 참이었어. 식은땀을 흘리길래."
" 인경아.."
폐비 강씨에 대한 소문은 먼 후궁 처소인 서월당까지 들려왔다. 이에 걱정이 된 조 귀인은 벗인 서화를 만나러 온 참이었다. 인경과 서화가 허물없는 벗임을 아는 한 상궁과 박 상궁은 잠시 서화의 얼굴만 보고 가게 해달라는 청에 방문을 열어주었다.
" 왜 이렇게 말랐어. 얼굴이 반쪽이 됐네."
" 그러는 너는 왜 이리 수척해진게야. 혹 최 귀인이 나에게 못 푸는 제 성질을 네게 분풀이 하듯 못살게 구는 거야?"
" 아니야. 요즘에는 무슨 꿍꿍이인지 처소에서 잘 나오지도 않아."
" ..."
" 박 상궁이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 폐비 강씨 일 때문에 이런 것이야?"
" ..."
" 너무 걱정하지 말어. 전하의 마음이 네게로 향해있는 걸. 네 손을 허망하게 놓거나 하실 분이 아니란 건 서화 네가 더 잘 알잖아."
벗의 위로에 눈물방울이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혔다.
천월각에서 다정하게 서로를 품고 있던 사내와 여인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가실 줄을 몰랐다.
그런 서화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인경은 천천히 서화의 등을 다독거렸다. 폐비 강씨의 존재로 상처받은 벗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 하여, 이제서야 겨우 이어진 두 사람의 마음이 또 다시 어긋나버리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 인경의 콧등이 시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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