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화 - 비밀 회합
" 저는... 파사국에서 온 세르샤라 합니다."
세르샤가 조심스레 낮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 조선말에 능한 자로군."
윤이 놀랍다는 듯 눈썹 한쪽을 말아올렸다.
" 어렸을 적, 아비를 따라 조선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도성에서 머물며 글을 배우고 말을 익혔습니다."
" 허면 그대의 아비 또한 상인인 것인가?"
" 그건 아니옵고... 선왕께서 살아계실 적, 제 아비가 파사국 사신으로 조선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 사신이라. 그대 아비의 명(名)이 무엇인가."
" 쿠루쉬 라샤드라 합니다. 파사국 전 황제폐하께서 군림하던 시절, 재상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 그대가 그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쿠루쉬 라샤드의 자(子)란 것인가? 과인이 어렸음에도 그대의 아비 모습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조차."
윤이 세자였던 시절, 파사국에서 온 사신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이들을 앞장서 이끌고 온 것이 파사국의 재상이었고 사신단을 위한 연회에서 윤은 호다람 쿠루쉬를 보았다.
범접할 수 없는 기운과 대나무처럼 곧은 눈빛을 가진 자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호다람 쿠루쉬의 기운에 압도되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랬던 그의 아들과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지 않은가.
" 기억하신다니 그저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 그대의 아비와 과인의 아비,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과인과 그대라.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군. 허면 그대는 상인이 된 것인가?"
" 그것은 아니옵고, 아비의 뒤를 따라 재상이 되어 현 파사국 황제폐하를 모시고 있습니다."
" 파사국의 황제는 그와 함께 자란 측근들로 이룬 젊은 4인의 재상을 두어 정치를 한다 들었다. 허면 그대가 그 4인 중 한 명인 게로군."
" 그렇사옵니다, 전하."
옆에서 조용히 두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영후가 세르샤의 본 정체를 알고선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악하였다.
' 재상이었다니...!'
파사국의 젊은 재상들이라면 영후 또한 떠돌이 생활을 하며 들은 것이 많았다. 영후의 기억이 맞다면 젊은 패기와 추진력, 그에 지지않는 넓은 혜안으로 네 명의 재상이 서로의 빈 부분을 메우며 파사국 황제를 보필하고 있다하였다. 그렇다면 그 말은 즉, 제 옆에 있는 이방인이 바로 그 네 명중에 한 명이란 것이었다.
" 헌데, 파사국 황제의 곁에 있어야 할 그대가 어찌 이곳 조선까지 온 것인가."
" 황제폐하의 명을 받아 파사국 상단의 단주를 감시하기 위해서입니다."
" 감시라?"
" 예, 전하. 단주는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신 제1 황자전하를 독살하려한 죄로 파사국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갈 곳이 없던 차에 명 나라가 파사국의 토산품을 사들여 조선에 몇 배나 되는 가격으로 부풀려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직접 물건을 가지고 와 팔 요량으로 예까지 오게된 것입니다."
" 황자를 죽이려 하였다면 삼족을 멸하여도 모자랄 터인데 그저 쫓겨나기만 하였다? 파사국 황제는 마음이 너그러운 자인가 보군."
" 단주의 여식이 파사국 황비입니다. 황제폐하와 황비전하 사이에는 아드님이 있지만 제2 황자전하로 제 1 황자전하는 돌아가선 선대 황비 전하 소생입니다."
" 그렇다면 현재의 황비가 계비라는 것인가. 다음 황제자리를 놓고 싸운 것이로군."
" 그러하옵니다. 단주는 황비의 아비라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나 관직을 잃음은 물론, 조선으로 오기 위해 꾸린 상단의 짐을 제외한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파사국에서 추방되었습니다."
" ...타국의 상단이 조선에 와 장사를 할 경우엔 별도의 절차가 필요하거늘. 허면 좌의정이 뒤를 봐준 것인가."
" 조선에 당도할 때까진 몰랐으나 그 자가 상단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 좌의정이?"
" 예, 전하."
세르샤에겐 영후에게서 들은 것보다 더욱 세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윤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러다 문득, 내금위장과 잠행을 나갔을 적 잠시 들른 주포에서 두 사내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 분명... 좌의정이 사는 곳으로 사치품들로 찬 궤짝들이 들어간다 했었다.'
" 상단을 꾸리는 단주라면 필시 거래 내역을 장부로 적을 터. 좌의정에게 뇌물을 주었다면 그에 대한 내역도 그리 했을 거라 생각하는가?"
윤이 묻자 세르샤가 답했다.
" 주도면밀한 자이니 그리할 것입니다. 훗날 혹시 모르는 일을 대비하여 좌의정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두고도 남을 자이니... 아마도 비밀 장부가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 찾아보겠습니다."
" 좋다. 그대를 한 번 믿어보지. 또한 그대의 단주가 좌의정을 도움으로써 무엇을 얻는 것인지 알아내야 한다. 파사국에서도 버림받은 자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말이다. 대사성 그대도 세르샤를 도와 증좌를 잡아내라."
" 예."
" 예."
시각이 늦었으니 이제 물러가라 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윤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하나 있었으니.
잠행을 나간 날 보았던 서화와 이방인이 다정하게 서 있던 모습.
들어온 순간부터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세르샤에게 윤이 말하였다.
" 고개를 들라. 과인을 위해 이리 늦은 시각에도 마다않고 달려와 주었으니 그대의 얼굴은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세르샤가 눈은 여전히 아래로 내리깐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 저 자는..!'
분명 틀림없었다. 중전과 함께 있던 이방인 사내.
저도 모르게 시기에 휩싸여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 보았으니 되었다. 그대도, 대사성도 이만 물러가라."
이렇게 이들의 비밀 회합은 끝이 났다.
***
" 이만 상을 물리게."
" 예? 벌써요? 이제 겨우 세 숫가락 겨우 넘기셨습니다. 잘 드셔야 기운을 차리시지요!"
" 날이 더워 그런가 입맛이 없구나."
밥알이 모래알처럼 거친 것이 영 목구멍 너머 들어가지 않았다.
서화가 상을 물리라 하자 박 상궁이 울상이 된 얼굴로 애원하였다.
" 허면 이것은 어떠십니까, 중전마마. 사가에서도 즐겨드시던 비름나물이옵니다."
통 식욕이 없는 서화를 위해 수라간에 일러 무쳐 온 비름나물을 서화의 밥 위에 살포시 놓아주었다.
이런 박 상궁의 수고가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에 한 숟갈 입으로 가져가려던 찰나,
" 읍!"
엄습해오는 역한 냄새에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말았다.
" 중전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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