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화 - 과거... 그리고 현재 (2)
" 지금... 그것이 사실인 것이냐?"
윤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 소인이 전하께 무엇하러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 허면 지금 폐비 강씨 노릇을 하며 과인을 기만하는 여인이 어찌 그이와 같은 얼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냐."
" 파사국에는 원하는 이의 얼굴과 똑같이 만들어주는 성형 (成形)법이 있다 하옵니다. 권력 암투에 있어 서로를 속이고 죽이는 권모술수가 숱하게 일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발달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 이런.... 감히..."
천월각에서 만났을 때 그리웠음에도 무언가 위화감이 들어 거리를 두려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던걸까.
그 기생은 대체 무엇을 위해 얼굴을 바꾸고 그렇게까지 한 단 것인가.
씁쓸함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 하오니 폐비 강씨 흉내를 내는 기생에게 속지 마십시오, 전하."
" 이 발칙한 사단을 도모한 무리들을 어찌 처벌하는 것이 좋겠느냐."
" 사특한 무리들을 처단함에 있어 도움이 될 자를 알고 있습니다, 전하."
" 그것이 누구냐?"
" 지금은 듣는 귀가 있을 수 있사오니 당장 말씀드릴 수는 없사옵고..."
영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윤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모아 속삭이며 말했다.
" 오늘 밤, 전하께서 윤허해주신다면 그 자를 데려오겠습니다. 이 엄청난 일을 제일 처음 알아챈 자이기도 하오니 믿으실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 윤허하노라."
***
밤에 다시 만나 밀회를 가지기로 한 윤과 대사성은 가까운 측근에게도 속일 요량이었다. 그리하여 윤은 침전의 병풍 뒤에 있는 비밀문의 통로를 영후에게 미리 낮에 귀띔해준 뒤 자신은 상궁들과 상선을 속이기 위해 침수에 드는 것처럼 보이려 하였다.
그런데 침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닌 폐비 강씨, 아니, 그이인척 하는 기생, 설매였다.
" 전하. 신첩을... 옛날처럼 안아주십시오."
헛웃음이 나왔다. 폐비 강씨는 늘 봉숭아처럼 부끄러움이 뺨에 물들어 가실 줄 모르던 여인이었다.
" 기억나십니까, 전하. 전하께서 하룻밤이 멀다 하고 매일 취하셨던 몸입니다. 신첩을...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신을 자신에게 밀착해오는 여인의 천박함에 치가 떨렸다.
눈물까지 떨구며 폐비 강씨인 척 하는 기생의 모습에 분노가 치민 윤은 설매를 넘어뜨리고 거칠게 달겨들었다.
' 네 모가지를 당장에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끌어내어 물고를 내고 싶었다.
그 배후에 있는 자들을 모조라 찾아내어 능지처참은 물론, 멸문지화를 내고 싶었다.
윤의 억센 손아귀에 숨통이 당장에라도 끊어질듯 헐떡거리는 설매의 모습에 살인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 ... 허나 아직 시작도 못한 일. 첫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겨우 이성의 끈을 붙잡은 윤은 그제서야 설매의 숨통을 놓아주었다.
자신이 설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아직 적시가 아니니...
다행히도 설매는 윤이 폐비 강씨가 성완군과 정분이 났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조용히 옷가지를 걸쳐입고 물러가는 설매를 보며 윤이 임 상선을 불렀다.
" 임 상선."
" 예, 전하."
" 금일(今日), 과인의 침소를 강녕전으로 정한 것은 대령상궁이 맞느냐."
" 그렇사옵니다."
" 허면. 대령상궁을 불러오라. 은밀히. 그리고 방금 전 과인의 침소에서 나간 여인을 은밀히 궐밖으로 내보내어야 함은 물론이고 오늘 밤 일은 없던 일로 하여야 할 것이야"
" 예."
상선이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겁을 먹은 듯 두려운 눈빛의 대령상궁 신씨가 들어왔다.
"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 신 상궁."
" 예."
" 과인의 침전에 들어온 여인과 관계가 있느냐."
임금의 침전을 관리하는 이가 대령상궁의 역할이었다.
이 깊은 궁궐의 임금이 침수드는 침전까지 기생이 들어왔다면 내부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터.
" 저...전하..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신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였다.
" 어찌 그 여인이 과인의 침전에 들어온 것이냐."
" 소..소인은... 전하께서 전(前) 중전마마를 은애하신 것을 잘 알기에 그분이 돌아오신 것을 전하께서 그 누구보다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워하던 지아비를 단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며 최 귀인 마마가 말씀하시기에 소인도 그에 동조하여 그만...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 지금... 최 귀인이라 하였느냐."
" 예... 전하와 전 중전마마가 그리 이별하신 것이 가슴아프시다며 도와드리고 싶다 하였사옵니다. 소인 또한 전하께서 얼마나 그리워하셨는지 잘 알기에 이리...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신 상궁 또한 그 기생이 폐비 강씨라 굳게 믿고 있는 듯 하였다.
임금인 자신의 침전에 허락도 없이 다른 이를 멋대로 들인 것은 불충 (不忠).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늘 곁에서 보필해온 늙은 충신의 충심(忠心)에서 우러나온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 신 상궁 자네가 벌인 일이 엄청난 일임을 알고 있느냐."
" 예.. 소인의 아둔한 행동으로 이리 전하께 불충을 저질렀으니... 당장 목숨을 걷어가겠다 말씀하셔도 여한이 없나이다."
" 그럼... 석달치 녹을 감봉한다."
" 예?"
각오한 것보다 가벼운 처벌에 놀란 신 상궁의 두 눈이 토끼눈처럼 커졌다.
" 또한 오늘 있었던 일은 함구해야 하느니라. 그 누구에게도 아는체 하지 말것이며 앞으로 동월당에서 자네에게 오는 연통은 모두 과인에게 고하라."
" ...그리...그리 하겠나이다, 전하."
***
" 전하."
한 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다시 어두워진 방 안.
영후가 누군가를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내었다.
" 왔느냐."
" 예."
" 절은 되었다. 거기 앉거라."
예를 갖추어 절을 하려는 영후와 그의 일행에 이를 생략하라 말한 윤이 다음 말을 이어갔다.
" 이 자인가. 이 일을 처단하는데 도움을 줄 자가."
" 예. 파사국 상단의 세르샤라는 자입니다."
" 이방인이로군. 헌데 파사국 상단 단주가 좌의정과 결탁하였다 들었는데 이 자와 단주가 한통속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장담하느냐?"
경계하는 윤의 눈빛에 세르샤가 입을 열었다.
"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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