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화 - 미궁속으로 (4)
" 고해주시게."
" 전하.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임 상선이 큰 목청으로 서화가 들었음을 알렸다. 그럼에도 장지문 너머 들려오는 답이 없었다.
" 전하. 중전마마.."
" 들라하라."
혹 못들으셨나 싶어 임 상선이 다시 목을 가다듬고 임금께 아뢰려할때, 안에서 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드시지요, 중전마마."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화는 큰 심호흡을 한 뒤 버선발을 한 발짝 내딛었다.
한걸음 한걸음 안으로 들어설수록 온 몸이 휘청일것 같이 커다란 떨림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임금의 용안이 가까워질수록 서화의 마음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절을 한 뒤 방석 위에 사뿐히 몸을 싣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며칠만에 보는 지아비의 얼굴은 수척하다 못해 까칠해보이기까지 했다.
" 전하."
서화가 나긋하게 윤을 불렀다.
" 중전."
윤도 읽고 있던 상소문을 잠시 내려두고 그제서야 서화와 눈을 마주쳤다.
전하께서도... 힘드신 것입니까.
어찌 그리 어둡고 슬픈 눈빛으로 신첩을 보시는 것입니까.
신첩이... 모르는 척 한다면... 그리한다면... 전하께선... 전하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시겠습니까.
" 근자에 들어 전하께서 정사를 돌보시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들어 혹 옥체라도 상하실까 염려되어 탕약을 지어왔나이다."
" ... 고맙소, 중전."
서화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미안하기가 그지없어 윤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궁궐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은 윤도 이미 들은 터.
분명 교태전에도 흘러들어갔을 텐데도 그것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중전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 ..."
" ..."
" 전하."
서화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윤에게 건네었다.
" ...!"
서화의 손에 쥐어져있는 자색주머니.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늘 품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으니까.
" 전하께서 오래전 신첩의 처소에 오셨을 때 놓고 가신 것입니다. 돌려드린다는 것을 신첩이 그만 망각하여 그간 돌려드리지 못하였나이다. 전하의 것임을 알면서도 전하께 되돌려드리지 않는 큰 불경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어떠한 벌이라도 받겠사옵니다."
교태전에 흘렸을 줄이야.
언젠가부터 품 안에 있어야 할 자색 비단주머니가 보이지 않아 강녕전이고 대전이고 온 궐을 이 잡듯 뒤졌던 윤이었다.
그럼에도 찾을 수 없어 오래전에 단념하였고, 그 이후엔 까마득히 잊고 있던 물건이었다.
자색 비단주머니를 쳐다보는 윤의 속엔 깊은 탄식이 흘렀다.
" ... 주머니 안을 보시었소?"
부디 중전이 보지 않았길.
서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입가를 부드럽게 올리며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였다.
" ... 보지 않았나이다."
" 헌데 어찌 과인의 것인 줄 안 것이오?"
" 제가 이 주머니를 발견한 것은 전하께서 강녕전으로 돌아가신 직후였습니다. 전하께서 누워계시던 자리에 이 주머니가 있었기에 신첩은 이것이 당연히 전하의 것이라 생각하였나이다."
윤은 더 이상 서화에게 묻지 않았다. 슬픔을 억누르며 애써 미소짓는 중전의 수고가 느껴졌기에.
애처로운 중전의 모습에, 윤 자신이 또 중전을 슬프게 하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윤은 중전이 교태전으로 돌아갈 때까지 죄어오는 목구멍을 참아내느라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
" 신분패를 보여주시오."
" 여기 있소."
야심한 시각,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출입패를 보여준 뒤 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최 귀인의 측근인 궁녀 소단이 여인에게 다가왔다.
" 그대가 설매요?"
" 그렇소."
" 따라오시오. 눈에 띄지 않아야 하니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오."
소단은 설매를 데리고 어디론가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드물고 다소 음산한 곳으로 설매를 데리고 가더니 이미 그곳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상궁을 불렀다.
" 신 상궁 마마님."
" 오셨는가."
" 예."
" 전하께서 곧 침수에 드실 시각이니 서둘러야 하네."
신 상궁. 임금의 측근으로 늘 곁에서 시중을 드는 대령상궁 신씨가 여인에게 다가왔다.
최 귀인의 처소에 처음 불려갔던 날 노모를 위한 약재를 받았던 신세를 되갚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 최 귀인 마마께 전해드리거라. 일전에 진 빚이 있어 이번은 그것을 갚는 것일 뿐이라고. 앞으로는 그 어떤 청을 하셔도 거절하겠노라 말이다."
" 알겠습니다, 신 상궁 마마님."
그 약재를 받고 나서, 마음 한 구석이 단 하루도 편할 날 없던 신 상궁이었다. 자신의 경솔한 행동 하나가 웃전에 누를 끼칠 수 있으므로. 노모의 약재 앞에 눈이 멀어 그것을 받아 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신 상궁은 한 여인을 전하의 침소에 들여보내달란 최 귀인의 청을 들어줌으로써 진 빚을 갚으려던 참이었다. 더욱이 그 여인이 자신의 웃전이 그토록 그리워한 님이라 굳게 믿고 있는 신 상궁은 폐비 강씨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기에 최 귀인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 안으로 드시지요."
일부러 전하의 침전 주변에 나인들과 상궁을 잠시 물려두었다. 이에 설매는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적막이 감도는 방 안에 금침 두 채가 보였다.
오늘 밤, 이곳에서 설매는 임금의 마음을 흔들 참이었다.
임금이 제일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로, 승은을 입으려는 계획.
' ... 그리고 회임을 할 것이다. 용종을.'
설매는 저고리 고름을 푸른 뒤 어깨 위에 걸치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치마 마저 벗어던졌다.
속저고리조차 벗어버리고 맨 어깨가 드러났을 때, 멀리서 한 무리의 걸음걸이 소리가 들려왔다. 필시 전하가 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걸음 소리가 문에 가까워졌을 때, 설매는 재빨리 등불을 껐다.
문이 열리자, 야장의를 입은 윤이 들어왔다.
" 누구냐. 어둠에 몸을 숨기다니. 모습을 드러내라."
어두운 방 안에 누군가가 있음을 직감한 윤이 차가운 저음으로 말했다.
" 전하... 신첩이옵니다. 전하의 여인...설이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으니 남은 것은 임금이 저를 탐하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윤은 설매의 짐작과는 달리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 그대가, 그것도 임금이 머무는 침전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 저...전하."
당황한 설매는 예상치 못한 흐름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분명 다시는 과인을 찾아오지 말라 하였건만...!!!"
" 전하... 신첩이옵니다... 전하의 단 하나뿐인 여인이란 말이옵니다."
설매가 눈물과 함께 윤의 품에 와락 달겨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윤의 가슴에 비벼대며 설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 전하, 어찌 신첩을 외면하십니까. 전하만을 오매불망 그리워하고 전하께 다시 안길 날만을 기다려온 신첩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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