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55화 (55/83)

제 55화 - 미궁속으로 (3)

" 자리에 앉아라. 흥분하여 앞뒤 구분않고 달겨들 만큼 가벼운 사안이 아니란걸 네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또한 좌의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거늘."

고규태가 영후에게 말했다.

" 좌의정이 어찌...이런 엄청난 일을..."

" 좌의정의 속셈이야 뻔하지 않느냐. 필시 전하께서 진심으로 마음에 품으셨던 폐비 강씨가 다시 살아돌아온 것처럼 꾸며 전하의 마음을 흔드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중전마마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것이고."

스승의 말에 교태전에 홀로 있을 서화가 생각났다.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은애로운 여인.

이 일로 인해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게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 전하께선 지금의 중전마마를 사모하고 계십니다. 이런 일에 전하의 어심이 흐트러질리가 없습니다."

" 사람의 마음을 어찌 그리 확언하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더욱이 폐비 강씨는 전하께서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일진데... 혹 그 기생이 폐비 강씨의 얼굴로 전하의 곁에서 지금의 중전마마를 내치고 자신을 중전으로 다시 만들어달라 조르기라도 하여 전하께서 흔들리시게 되면 어쩌겠느냐."

" ..."

"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지존이기 이전에 사내이시다. 무릇 사내와 여인의 관계는 훨씬 복잡미묘한 것, 전하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야. 전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그것을 알아낸 뒤에 그에 따라 좌의정을 잡을 차선책을 마련해라. 그 놈은 미꾸라지같은 놈이니 분명 이 일이 발각되어도 빠져나갈 뒷구멍도 미리 마련해 놓았을게다."

스승의 말이 옳았다. 이에 영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 라며 대답하였다.

' 지켜드리겠습니다. 전하와 중전마마의 사이를 음해하려는 사특한 이를 반드시 처단할 것입니다. 반드시 제가...'

영후는 속으로 다짐하였다.

***

" 바로 이것이었습니까, 아버님! 호호호!"

동월당 처소에선 쩌렁쩌렁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내 중전 고년으로 인해 꽉 막혀있던 이 명치가 시원해지는 것 같구나! 그래, 교태전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더냐?"

최 귀인이 나인에게 물었다.

" 예, 마마. 중궁전은 아직 고요하다 하옵니다."

" 아직은 숨쉴만 한가 보구나. 허나 두고 보라지. 곧 피눈물 흘리며 중궁전에서 나가게 만들어 줄 것이야. 운이 좋아야 그나마 폐서인 되어 교태전에서 나갈 것이다. 어서 하루 빨리 그 날이 찾아와야 할텐데 말이다. 벌써부터 흥이 돋는구나."

" 마마, 혹 누가 엿듣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나인이 목소리를 죽이며 말하자,

" 네년은 간도 콩알만한가 보구나. 들을테면 들으라지. 중전은 이제 거센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신세다. 이 궐 안에서 중전이 전하께 버림받았다는 것은 습관(무수리)도 안다지? 땅으로 떨어진 해와 같은 중전이 무에 무서울 것이 있겠느냐."

" 하오나..."

" 걱정마라. 중전이 버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니."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말이다.

기다려라, 중전.

내 너에게 당한 수모와 치욕은 니쳔(이자)까지 넉넉히 얹어 되돌려 줄테니.

네년이 교태전에서 쫓겨나는 날까지 나는 이곳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며 노닐고 있으면 될 터.

그 날이 참으로 기다려지는구나.

최 귀인의 서슬퍼런 눈빛과 함께 하늘로 떠오를 듯한 입꼬리는 한동안 내려올 줄을 몰랐다.

***

할짝할짝.

이제는 제법 품 안 가득 들어올듯 자란 묵직한 모습의 복녕이가 서화의 품 안에서 그녀의 손목을 정성스레 핥았다.

마치 서화의 우울한 기분을 다 안다는 듯,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듯 복녕이는 이따금씩 서화와 눈을 맞추려 지긋이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서화가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멍하니 창밖 너머로 시선을 둔 채 하염없이 앉아있자 복녕이 앞발로 서화의 팔을 자신쪽으로 잡아끌며 낑낑거렸다.

" 끼잉..끼잉.."

그제서야 복녕이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긴 서화. 이를 놓칠새라 복녕이 꼬리를 흔들며 눈동자를 맞췄다.

" 내가 너무 무심하였구나."

복녕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제서야 복녕이도 마음이 놓인다는 듯 눈을 꿈뻑꿈뻑 거리며 서화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한참동안 복녕이를 쓰다듬던 손길이 점차 느릿해지더니 손의 움직임이 멈추고 복녕이의 머리 위에 물방울이 투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 흑..."

왜 이리 이 자리는 이토록 어렵고 힘겹기만 한 것인지.

언제나 감내해야하고 버텨야할 것들 투성인건지.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겨우 안간힘을 쓰며 꿰매어놓았더니 얼마 못가 꿰맨 곳 부분부분이 튿어져버렸다.

자신의 머리에 하나 둘씩 떨어지는 따뜻한 물기에 복녕이 고개를 들어 서화를 쳐다보았다.

이에 위로하듯 서화의 품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며 자리잡는 복녕.

상궁들과 나인들 앞에서 차마 보일 수 없던 눈물이 어린 강아지 앞에서 터져버렸다.

드륵-.

서안의 서랍에서 서화가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색 비단주머니.

언젠가 윤이 잔뜩 취하여 교태전에 합방하러 왔던 날, 자신이 마음에 품은 여인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던 날,

... 그가 흘리고 간 물건이었다.

주머니 입구를 벌려 뒤집자 서화의 손바닥에 짤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가락지 한 쌍이 떨어졌다.

한 사람이 쌍가락지로 쓰는 것이라 하기엔 크기가 무척 달랐다. 색 또한 달랐다.

큰 가락지는 청옥, 작은 가락지는 홍옥.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서화는 이를 처음 본 순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임금과 그의 정인이 나누어 끼던 가락지였다는 것을.

' ... 돌려드린다는 것을 잊고 있었구나.'

윤에게 돌려주려 하였으나 가락지를 찾는 기색이 없기에 서화 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아비와 사이가 가까워지고 각별해지면서 행복에 휩싸여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잊어버린 척 하고 싶었을지도.

서화 자신이 가락지를 다시 윤에게 돌려주면 그가 떠나간 옛 정인을 떠올리게 될까봐 두려워서 애써 기억에서 지우려한 것일지도.

윤과 그가 '설'이라 부르던 폐비 강씨가 천월각에서 끌어안고 있던 모습이 생각났다.

자신 따위는 끼어들 틈도 보이지 않을만큼 애틋해보이는 두 정인이었다.

심장이 밧줄에 꽁꽁 싸여 죄어오는 듯 했다. 심장이 도려내지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터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 ...이제는 돌려드려야겠지.'

서화는 두 팔을 뻗어 복녕이를 안아올려 자신의 가슴쪽으로 꼭 감싸안으며 눈가에 남은 물기를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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