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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궁궐의 봄-54화 (54/83)

제 54화 - 미궁속으로 (2)

" 스승님께서 이곳엔 어쩐일이십니까? 제가 그리 입이 닳도록 오시라 해도 들은 척 한 번 안 하시고, 술 한잔 청해도 거들떠도 보시지 않으시던 분께서 술 한잔 내놓으라며 먼저 찾아오시다니요."

영후는 느닷없이 아무 기별도 않고 찾아온 동명골 훈장 고규태를 맞이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혹, 어디 죽을 병에라도 걸리신 것입니까?"

" 예끼, 이놈아. 내 목숨이 오늘 내일 할만큼 위중하다면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거늘,  만약 그렇다면 그 귀한 시간을 쪼개어 네놈을 만나러 왔겠느냐?"

" 듣고보니 스승님의 말씀이 옳은 것도 같습니다."

영후의 농에 훈장이 흘겨보며 지청구를 늘어놓았다.

" 아버님과 마주치기 싫어하시는 분께서 저희 집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다행히 아버님은 출타중이십니다."

" 일부러 네 아비가 등청한 시각을 골라 내 걸음한 것이 아니냐. 그 면상 삼십년 넘게 보았으면 되었지, 뭐 그리 고운 얼굴이라고 자꾸 들여다 볼 일이 있겠느냐. 그럴 바엔 저~ 청막골 마을네 심씨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는 것이 낫지."

고규태는 영후의 아비인 국사 홍영익과 허물없는 친우지간이었다. 항상 서신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논하며 글로 우정을 다졌다.

고규태는 이미 열다섯에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인물로 그의 총명함은 청명한 하늘과 같았다. 임금을 섬기며 백성을 돌보는데 있어 최선을 다하겠노라며 다짐한 그는 관료들의 악취나는 부조리를 목격하게 되면서 절망에 빠졌다.

이들이 궐문의 빗장을 걸어잠그고 임금의 눈과 귀를 멀게 한 주동자이며 지존인 임금을 허수아비 신세로 만들어버렸음을 알았지만, 이미 악에 물들어버린 이들을 물리치기엔 너무 어리고 감내키 버거웠다.

궐안은 칼과 피비린내만 안 날 뿐,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이에 질려버린 그는 관직을 내려놓고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방방곡곡 떠다니는 삶을 택했다.

그리고 이제 막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 눈이 소복히 쌓인 듯 희끗희끗한 머리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주름을 가진 노인이 되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영후에게 훈장으로 와주십사 청을 받았을 때, 이번에는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동명골 아이들을 바르게 훈육하여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들겠다 다짐하였다.

" 스승님다우신 말씀입니다. 헌데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기별을 하셨더라면 스승님께서 이리 걸음 하지 않으시도록 제가 찾아뵈었을 것을요."

잠시 옛 기억을 회상하느라 흐려졌던 고규태의 눈동자의 초점이 영후의 물음과 함께 되돌아왔다.

" 아무래도 동명골엔 낯선 이들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경계가 되더구나. 해서 내가 직접 온 것이다. 네놈 집이라면 함부로 엿듣는 이도, 염탐하는 이도 없을게 아니냐."

" 예? 그리 주변을 살피시며 경계하셔야 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혹, 스승님께 변고라도 생긴 것입니까?"

" 내가 아니라, 높은 분에 관해서다."

" 높은 분이라 하시면... 중전마마 말씀입니까?"

영후가 물었다.

" 이 나라의 지존을 말하는 것이다."

" 전하요?"

궐에는 관심조차 두고 살지 않는 스승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영후가 토끼눈이 되었다.

" 폐비 강씨가 살아 되돌아왔다 하더구나."

" 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 폐비 강씨가 자결을 하였다 하였지만 사실은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였다가 기생이 되어 주상전하와 중전마마의 국혼기념일에 다시 나타났단 말이야."

" 그건 말도 안됩니다! 스승님께서 무언가 잘못 아신 것이 아닙니까?"

" 그렇지.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고규태가 영후의 부정에 맞장구를 치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자 영후의 얼굴엔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 네놈도 아는 파사국의 피부가 먹 같이 검은 사내가 며칠전 나를 찾아왔었다. 그러더니 엄청난 이야기를 해주더구나. 한 기생이 파사국 상단 단주와 결탁하여 얼굴을 폐비 강씨처럼 바꾸고 마치 그이인양 행세를 하고 다닌다면서."

"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 파사국이야 별의별 희한하고 듣도 못한 것들과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아니냐. 자기네 몸집들의 수십배는 되는 동물의 뿔을 잘라 함을 만들고 풀초가루에 물을 섞어 살갗에 흉측한 문양들을 그려넣는 그놈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스승님. 파사국 상단의 단주가 그런 일을 벌인다 하여 얻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 상단을 이끄는 우두머리다. 아무런 득 없이 이런 일에 발을 들일리가 없겠지. 이방인이라면 더더욱."

" 허면..."

" 누군가와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 사단을 일으킨 배후가 있는게지."

" 배후라면..."

" 그 사내의 말로는 좌의정이 파사국 단주와 함께 폐비 강씨 행세를 하는 기생을 만났다 하더구나."

좌의정...!

그제서야 영후는 생각이 났다.

유월관에서 얼핏 보았던 댕기머리의 여인.

그 날 화초를 치룬다며 치장을 하고 있던 여인.

여인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아 한참을 생각하였더랬다.

그럼에도 생각이 나지 않아 별거 아니겠거니 하며 크게 신경쓰지 않고 넘어갔었다.

그 여인은 바로 폐비 강씨와 똑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 어찌 그것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였다. 그 때 알아차렸더라면...

자신의 둔함이 원망스러웠다.

" ... 그 기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후가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힐만큼 괴로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 뭬야?"

" 좌의정 대감이 제게 자신의 딸과 맺어주고 싶다며 유월관에서 만나자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화초값을 치룬 사내와 하룻밤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던 댕기머리의 여인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본 듯 하여 기억해내려 하였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때 알아차렸더라면... 그랬더라면..."

" 후회한들 어쩔 도리가 있겠느냐. 이미 늦어버린 것을."

" 어찌하여 세르샤는 제게 직접 와서 알리지 않고 스승님께 찾아가..."

고규태도 영후와 같은 질문을 세르샤에게 하였었다. 그리고 이내 세르샤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에 고규태는 감탄하고 말았다.

" 피부색이 다른 자신이 이 나라의 국사와 대사성이 사는 집안의 문턱을 함부로 넘기엔 지켜보는 눈들이 많아 조심스럽다 하더구나."

" ..."

" 그 단주라는 놈은 매우 영악하고 모든 것에 의심이 많고 매사에 조심스럽기가 그지없어 파사국 사내가 가는 곳곳마다 사람을 심어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였다. 동명골이야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이 드나드는 곳이니 그 날 나를 만나러 동명골에 온 것은 단주도 크게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 하더구나. 그러면서 꼭 네게 이 사실을 전해달라 간곡히 청하였다."

" 전하께선... 하오면 전하께서는 그 기생을 만나신 것입니까."

" 만나기만 하신 것이 아니야. 파사국 사내의 말에 의하면 그 기생을 죽은 폐비 강씨인 것으로 믿고 계시는 듯 하더구나. 이미 교태전에 새 주인이 들어계시니 이젠 돌아올 자리가 없다며 기생을 내치셨다 하나 그 기생을 품에 안으시기도 하셨다 하니..."

" 전하께 이 사실을 당장 알려야 합니다, 당장!"

영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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