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53화 (53/83)

제 53화 - 미궁속으로 (1)

폐비 강씨는 기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오랜시간 궐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 언제 또 전하의 용안을 뵐 수 있겠습니까."

설이 수줍게 묻자 윤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미 자신에게는 현 중전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미 폐서인 신분에 기생으로 전락한 설을 다시 궐 안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만나기 어려울 것이오. 이미 그대는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질 않소."

" ...! 하오나 전하, 신첩은... 이리 전하의 용안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그 힘겨웠던 무수한 날들을 이 악물고 견뎠사옵니다. 전하는... 신첩의 지아비가 아니십니까. 전하께서 다른 여인을 비로 들이셨어도 말입니다."

설의 말에 마치 자신을 두고 다른 여인을 중전으로 맞이했다는 여인의 시기와 질책이 서린 듯 했다. 그렇다고 설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됐다.

" 과인이 잠시 실성을 하였소. 그만 돌아가시오. 과인은 오늘 그대를 본 적도, 마주친 적도 없다 생각할 것이오."

"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전하. 흑흑..."

설이 바닥에 주저앉아 기진맥진해질 만큼 구슬프게 울며 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 신첩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전하. 이미 부부의 연이 끊어졌다고 하나 그래도 신첩의 지아비는 오직 전하뿐이십니다. 흑흑.."

" 모든 것을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소. 못 들은 것으로 하리다."

윤은 울고 있는 설을 향해 등을 보이며 뒤돌아섰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정인이었으나 자신에겐 이미 마음을 내어준 여인이 있었다.

잠시 옛 정인을 보고선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면 거짓이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이전의 상처는 어느덧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 버렸다.

윤은 다소 느릿한 걸음으로 천월각을 떠났다.

홀로 남겨져 흐느끼던 설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선 궐 밖을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

" 어서 오게. 어찌, 일은 잘 되었는가."

" 기다리고 있었네."

칠흙같이 어두운 밤. 누군가를 기다리던 두 사내가 드디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질세라 앞다투어 말을 건넸다.

" 그것이... 생각보다 어려울 듯 합니다."

장옷을 걸친 이가 머뭇거리며 말하였다.

"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 바짓가랑이까지 붙잡고 통곡하며 다시 보기를 원한다 청하였으나 단칼에 거절하더이다."

"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분께서 평생 제일 사모하신 분은 폐비 강씨 뿐일세."

" 하오나 사내의 마음이 무릇 한 곳에 머물고만 있겠습니까.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만 있는 고인 물도 오래두면 썩은 악취가 나고 벌레가 꼬이는 법입니다. 이년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안기까지 하더니 막상 가까이하기는 꺼리시었습니다."

장옷을 머리 정수리에서 걷어내며 얼굴을 드러낸 이는 다름아닌 조금 전 윤의 품에 안기었던 폐비 강씨였다.

" 허면 아주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궐을 계속 드나들며 그분을 흔들게."

한 사내가 말하였다.

" 한낱 기생년에 불과한 이년이 어찌 그리 궐을 제집 드나들듯 그럴 수 있겠습니까?"

폐비 강씨가 말하였다.

" 내가 뒤를 봐줌세."

" 영감께서 말입니까?"

" 그렇다네. 그러니 자네는 그분의 마음을 돌려 총애를 받으란 말일세. 이미 승은을 입었으니 신의 (宸儀, 임금의 몸)에 대해서도 잘 알 것이 아닌가. 모든 술수를 동원해서라도 꼭 다시 한 번 승은을 입어 회임을 하게."

" 그리해 보겠습니다."

" 허면 그리 알고 물러가보게. 내 따로 기별을 할 터이니."

" 예."

짤막한 대답과 함께 폐비 강씨가 물러갔다.

바깥의 소리가 잠잠해지자, 방 안에 남아있던 두 사내가 대화를 이어갔다.

" 교태전에서 전하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놓은 듯 합니다."

" 그래도 첫 정인만은 못할 걸세. 무릇 사내에게 첫 정인은 애틋하고 각별한 법이니 그분이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 정말 그분의 마음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다소 경박한 면이 있는 듯 하여 자칫 큰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옵니다."

"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세. 설매가 자네와 함께 처음 나에게 왔던 날, 생김새가 폐비 강씨와 판박이라 내 얼마나 기함할 뻔 하였는줄 아는가."

" 폐비 강씨의 초상화를 예전에 그 집안을 섬기던 여종에게서 받아내느라 참으로 애먹었습니다. 중전이 되고 나서 그려진 초상화는 폐위되면서 모두 불태워 없어졌고 입궐하기 전 처녀때 그린 초상화 하나가 전부라 그 여종에게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여도 내어줄 생각을 하지 않기에 결국엔 피를 보고 말았지요."

" 그래도 참으로 신기한 일일세. 폐비 강씨와 똑 닮은 얼굴로 만들어버리다니."

" 거사를 위해서라면 그게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 자네의 그 노고는 잊지 않겠네."

" 고맙습니다, 좌의정 영감."

***

이를 밖에서 숨죽여 엿듣고 있던 아르샨은 숨 한 번 돌릴 새도 없이 잰 걸음으로 달려가 세르샤에게 그대로 고했다.

" 역시...! 단주 그 놈이!!!"

세르샤가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파사국에서도 뒷공작을 하다 쫓겨난 단주였다. 아무 소란 피우지 않고 본업인 상단일에만 신경쓰라 그리 부던히도 일렀건만 기어코...!!!

" 뭔가 큰 일이 터질 것 같지 않습니까, 세르샤님. 이러다 자칫 저희 상단까지 이 일에 엮여 큰 화가 닥칠수도 있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 좌의정과 단주가 한 통속이라니. 궐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세르샤의 근심어린 걱정 속엔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중궁전의 상궁인 향...

" 아, 그리고 지난 번 단주님의 방에서 나왔던 기생들 말입니다. 그 중 한 명이 오늘 단주님의 방에 든 기생이었습니다."

" 그게 정말이냐?"

" 예. 제가 눈썰미 하나는 기가막히지 않습니까. 밤이었지만 얼굴을 분명 보았습니다. 확실합니다."

" 그렇다면... 그 때 본 기생이 이 나라 임금의 옛 정인을 사칭한다는 것인가."

아르샨의 말대로라면 설매라는 기생이 폐비 강씨 흉내를 낸다는 것이었다.

" 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짐작해보면 그러한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까."

" 이를 어찌한다..."

당장 궐 안에 향과 대사성에게 알려야했다. 동명골에 필요한 물자를 건네받는 것도 달포에 한 번 뿐이오, 늘 궐에서 먼저 기별이 왔기에 세르샤가 먼저 이들에게 당장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한참을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고민하던 세르샤는 이내 마땅한 방도가 떠올랐는지 눈빛을 번뜩이며 옆에서 멀뚱히 앉아있던 아르샨에게 말했다.

" 방도를...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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