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52화 (52/83)

제 52화 - 품 안에서 우는 여인, 그리고...숨어서 우는 여인

" 전하. 어찌 그러십니까."

윤의 돌발적인 모습에 서화가 걱정되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며 물었다.

" 전하...?"

" ...아니오. 잠시 내가 헛것을 본 듯 하오."

" 혹 미령하신 것입니까? 어의를 불러오겠습니다."

" 괜찮소. 오늘은 우리 두 사람을 위한 날이 아니오? 진연이 끝나고 나면 그 때 쉬어도 늦지 않소."

" 하오나..."

" 염려치 마시오. 과인은 괜찮으니."

다시 자리에 앉은 윤. 그의 입은 서화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눈은 앞에서 검무를 추고 있는 사람에게 단 찰나의 순간도 빠지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빠른 동작과 좀 전보다 더 많은 여악들이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는 바람에 그만 응시하던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이내 두 눈을 바삐 굴리며 놓친 이를 찾아보려 하였지만 윤의 눈에 낯익었던 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잘못 본 것이 틀림없다.'

진연이 파하고 난 뒤에도 윤은 쉽사리 평소처럼 교태전에 들지 못하고 강녕전에서 주위를 물리친 채 홀로 머리를 싸맨 채 앉아있었다.

이미 다 가슴에 묻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과거의 기억도 차츰 바래지기 시작했을 거라 생각했다.

허나, 그것이 모두 자만이었던가.

검을 들고 춤을 추는 여악의 얼굴이 그이와 그리도 닮아보이던 것이 정녕 착각이었을까.

지금 과인의 곁엔 현 중전이 있다. 그 사람을 이리 가슴 가득 사모하고 있건만 어찌 비슷한 이의 얼굴을 보았다고 이리 마음 속에서 불꽃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듯 이리 죄인단 말이냐.

저녁 수라도 물린 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천월각으로 향했다.

한 동안 천월각에 오는 것을 소홀히 하였음에도, 이 곳에서 달보다 더 밝은 모습으로 서 있던 이가 떠나갔어도, 천월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천월각 옆의 연못에 비치는 달의 모습 또한 가히 명관이었다.

윤은 임 상선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라 명한 뒤 천월각으로 향했다.

그리움에 심장이 새카맣게 타들어 잿더미만 남을 때면 그 사람의 흔적이라도 찾고자 수도 없이 걸음했던 곳.

하루에도 여러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버린 그 사람이 너무도 보고파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추억이라도 곱씹어보고자 찾았던 곳.

오늘은 유달리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이 흘렀다.

역시. 잘못 본 것이다.

윤이 몸을 돌려 강녕전으로 돌아가려던 그 때,

" ...전하라면 오실 줄 알았습니다."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어둠 짙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전하라면... 이곳으로 걸음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전하와 제가 자주 왔던 천월각으로요."

치자꽃과 같은 스란치마에 푸른빛 당의를 입은 여인. 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와 똑 닮은 여인의 모습에 윤의 눈동자엔 당혹감이 일렁였다.

" 그리웠습니다, 전하."

" 정녕...당신이 맞는 것이오?"

언제나 흔들림 없던 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 예..전하."

여인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서렸다. 이내 당의자락 위로 투툭 하는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떨어지는 눈물방울들.

" 이게...대체 어찌된 것이오. 나는...그대가 죽은 줄로만 알았소."

" 죽은 것이나 진배없었지요.. 이리 살아 전하를 다시 뵐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여인의 눈가에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본 윤은 끝내 여인을 품에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품 안에 가둔 여인으로 인해 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 멀리서 이 모습을 보며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홀로 숨죽이며 우는 가여운 그림자 하나를.

***

때는 바야흐로 여섯 해 전.

선왕의 서거로 인해 윤이 보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젊고 유능하며 정사를 돌봄에 있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왕.

그런 그에게도 모자란 것이 있었으니, 이례적으로 세자시절부터 후궁만 두어명 둔 채 내전의 자리를 비워두었다는 것이었다.

여인보단 학문에 더욱 열성이었던 그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임금이 되고 뒤를 이을 후사가 없다는 것, 그나마 있던 후궁 둘 모두 윤이 보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두창에 걸려 세상을 떠나 내명부가 텅텅 비어버렸다는 것, 임금의 곁에서 대칭을 이루어야 할 교태전의 자리가 비어있다는 이유로 처녀간택이 행해졌다.

자신의 여인은 직접 보고 고르겠다며 이례적으로 삼간택에 참여한 윤. 그곳에서 윤은 설을 만났다. 이조판서 강이직의 여식 강설. 삼간택에서 그 누구보다 돋보였던 설은 임금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다른 여인은 필요없고 오직 설 하나면 된다는 윤의 고집에 그렇게 교태전의 주인이 되었다.

윤과 설은 한 쌍의 원앙처럼 다복한 금슬로 궐 안을 따스하게 물들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원토록 행복할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사이는 윤의 이복형인 성완군으로 인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성완군과 설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잦다며 궐 안에 몹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윤 역시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는 곡해라며 설이 애원하였지만 중전이 임금인 자신을 기만하고 성완군과 놀아난 것이라 생각한 윤은 설을 점차 멀리하기 시작하였고 두 사람의 골은 점점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 얼마 안 있어 중전의 회임 소식이 들려왔다. 왕실의 큰 경사가 났음에도 마냥 좋아라만 할 수 없었던 윤. 중전의 뱃속에 든 아이가 자신의 핏줄인지 성완군의 핏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자신의 핏줄이라 울부짖는 중전, 마음 고생이 심했던 탓이었을까. 설은 뱃속의 용종을 잃고 말았다.

이 세상에 태어나보지도 못한 채 지고 만 아이. 상실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설은 어느 날, 윤을 찾아와 말했다.

" 저를 궐 밖으로 보내주십시오. 성완군을 흠모하나이다."

이에 진노한 윤은 설을 중궁전에서 내쫓은 뒤 성완군과 함께 각각 유배를 보내는 것은 물론이요, 설의 아비인 이조판서 강이직을 참형해 처했다.

너무도 깊이 사랑한 탓이었을까. 설을 향한 증오 속에서도 중전을 향한 그리움에 밤마다 괴로움에 허덕여야 했다. 자신의 마음을 저버린 대역죄인인 여인을 윤은 그리워하며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 전하! 강화도에 계신 중전마마께옵서...!"

" 지금 누구를 중전이라 부르는 것이냐!"

어느 날, 임 상선이 아연실색하여 임금의 침전으로 들어오자마자 다급한 목소리로 고하자 윤이 날카롭게 호통쳤다.

" 폐비 강씨가 목을 매 자결했다 하옵니다!"

" 뭐라?"

윤의 눈썹이 뒤틀렸다.

상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이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자신이 좀 더 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더라면 지금과 달라졌을까.

성완군과 정말 정분이 난 것인지 물어봐야 했던 건 아닐까.

수십가지의 후회와 회한이 몰려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너무도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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