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화 - 여인들의 기싸움
" 오늘은 우리 여인들이 좋은 뜻을 가지고 모인 자리입니다. 이런 기쁜 날에 서로 얼굴 붉혀서야 되겠습니까."
이쯤에서 두 사람 모두 그만하고 물러서라는 의미였다.
" 송구합니다, 중전마마. 허나 최 귀인에게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이 사람은 선대왕 마마의 아우이자 대왕대비 마마의 둘째 아드님인 봉성대군의 안사람입니다. 비록 외명부이나 품계로 보면 정 1품이요, 후궁인 최 귀인의 품계가 종 1품이니 엄밀히 품계만 놓고 따지자면 제가 더 높지요. 또한 주상 전하가 이 사람의 조카님이시니 최 귀인은 제 조카며느님이 됩니다. 그런데 어찌 윗사람인 이 사람에게 그리 눈을 부라리고 치켜뜨는 것입니까. 더욱이 내외명부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말입니다."
부부인 임씨는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더욱 목청을 높였다.
윤은 봉성대군과 각별한 사이였다. 윤의 청으로 봉성대군은 시운과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부자 (父子)의 연을 맺었고 일찍 승하하신 선대왕을 대신해 윤의 가까이에서 진심어린 충언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윤 역시 봉성대군을 아비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 봉성대군의 여식의 혼처도 자신이 발 벗고 좋은 짝을 찾아 맺어주었다.
그러다 보니 봉성대군의 처인 부부인 임씨와 윤의 관계 역시 두터울 수 밖에 없었다. 윤이 사랑하던 여인을 잃었을 때 곁에서 그 누구보다 깊은 마음으로 그를 위로하였고 서화가 새로 중전이 되어 교태전의 주인이 되고 임금과 금슬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좌의정이 부원군이 되고싶어 안달이 났다는 풍문이 어름어름 들려왔을 때 그의 성정을 잘 아는 봉성대군은 그의 여식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상 못된 술수를 쓸 것이 분명하다며 걱정하였다.
좌의정이 대왕대비전과 대비전을 오가며 임금과 귀인들의 합궁을 주청드렸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대왕대비전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들렀다 듣게 된 부부인 임씨는 그렇지 않아도 탐탁치 않던 최 귀인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전인 서화의 성정이 유려하다는 것을 아는 부부인 임씨는 서화를 대신해 자신이 나서서 최 귀인에게 함부로 중궁전을 탐하지 말라 경고하고자 하였다.
" ...이 모든 것이 다 부덕한 제 탓입니다. 최 귀인 마마의 언행이 부부인 마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그것은 제 불찰이오니 저를 탓하여 주십시오."
정경부인 박씨는 허리를 숙여 부부인 임씨에게 사죄를 하였다.
' 네것들이 감히...내 어머니와 나에게 수모를 줘? 언젠가 백 배, 천 배로 되갚아 줄것이다.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야!'
최 귀인은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 반드시 받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 되새기면서.
***
다음날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는 수견례와 누에고치를 나누어주는 조현례를 마친 후, 서화는 내외명부들에게 신하들의 진하를 받는 것 대신 차 한잔을 대접하겠다며 향원정으로 모이라 하였다.
봄 내음에 흠뻑 취한 내외명부의 여인들은 향원정 전각에 둘러앉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중전마마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 중전마마 납시오."
상궁의 알림에 여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구부렸다. 서화가 전각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상석에 사뿐히 앉고선 모두 앉으세요-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화의 말에 모두 착석한 뒤 조심스레 얼굴을 들어 상석을 바라본 자리엔 수수하기 그지없는 중전의 모습과 그 앞의 작은 함과 커다란 함이 보였다.
" 오늘 내외명부 여러분들을 이 자리를 따로 만들면서까지 오시라 한 것은 이 앞의 함들 때문입니다."
딸깍.
서화가 작은 함을 열자 그 안엔 상아를 깎아 만든 비녀와 노리개 장식, 그리고 작은 병이 들어있었다.
" 이것이 무엇인지들 아시겠습니까."
" ..."
여인들은 그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함구할 뿐이었다.
" 여러분들의 머리와 노리개에 달려있는 상아 비녀와 노리개입니다. 또한 이 병 안엔 향유가 들어있지요."
" ..."
" 어제와 오늘, 친잠 의식을 거행하는 동안 여러분들에게서 향유의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 ..."
" 그 뿐만이 아니지요. 상아로 만든 물품은 그 가치가 매우 희소하여 이를 사려는 여인들로 인해 부르는 것이 값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돈다 들었습니다. 헌데 희한한것이 말입니다. 그토록 귀하고 구하기 힘든 것들이 이곳에 앉아있는 분들의 머리와 치마 앞섬에 너나할 것 없이 달려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사대부 여인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에둘러 질책하는 중전의 말에 여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 안 그렇습니까?"
서화가 물었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여인들은 자수가 빈틈없이 놓인 화려한 원단의 비단 당의를 입고 머리 장식은 빈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히 달려있었다. 행색만 놓고 본다면 눈 앞의 여인들이 궐 안의 왕족들이고 서화 자신은 이들의 시중을 드는 상궁이라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 나라에 기근이 들어 굶고있는 백성이 허다합니다. 풀죽을 쑤어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 이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백성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이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우리 내외명부 여인들이 이리 물욕에 빠져 사치를 즐겨서야 되겠습니까."
여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서화는 커다란 함을 열고선 옆에 있던 박 상궁에게 말했다.
" 박 상궁, 내 패물함을 가져오게."
" 여기 있사옵니다, 중전마마."
박 상궁이 조심스레 패물함을 내오자 서화는 이를 열고선 그 안에 있던 가락지며 노리개며 아낌없이 큰 함으로 옮겨 담기 시작했다.
" 내명부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백성들의 굶주림을 돕겠습니다. 매일 삼시세끼 꼬박 배불리 팔첩반상 이상을 먹고 입고픈 것, 하고픈 것 다 하는 우리네들이 수많은 패물들 중 조금의 일부를 떼어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줄 수 있다면 이보다 뜻깊은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자신이 이리 먼저 모범을 보였으니 자네들도 이를 따라 온 몸에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걸치고 있는 패물들의 일부를 떼어 내어 함에 넣으라는 의미였다.
" 두 귀인들에게 함을 건네시게."
서화가 박 상궁에게 말하였다. 이에 박 상궁은 서화의 앞에 있던 함을 들고 최 귀인가 조 귀인의 앞으로 가져갔다.
" 중전마마의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깊은 마음에 감복하였나이다. 소첩, 기쁜 마음으로 돕겠나이다."
조 귀인이 자신의 머리에 달려있는 떨잠과 꽂이, 그리고 홍옥으로 된 노리개까지 모두 벗어내어 함 안으로 넣었다.
최 귀인은 애꿎은 박 상궁을 한참동안 두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노려보더니 거친 손길으로 자신의 떨잠 두 개와 호박 노리개를 풀러 함 안으로 던져 넣다시피 하였다.
" 고맙네, 최 귀인. 조 귀인. 이제 외명부 앞으로 함을 내어가게."
백성을 돕고자 하는 일에 서화는 거침이 없었다. 서화의 눈치를 보던 외명부 여인들은 속으로 쓴맛을 삼킨 채 몸에 걸치고 있던 장식들을 떼어 내어 함 속으로 넣었다. 혹여 조금만 넣었다가 자신의 부군들에게 화가 미칠까 하여 아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함의 무게가 묵직해질 만큼 아낌없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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