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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궁궐의 봄-48화 (48/83)

제 48화 - 꽃 피울 날을 기다린다네

" 예끼, 이 놈아. 아주 얼굴에 써 붙여 다니지 그러냐?"

" 예?"

서화와 세르샤 단 둘이 남겨놓고 밖으로 나온 영후는 연신 좌불안석, 안절부절이었다. 이를 아까부터 말 없이 보고 있던 훈장은 한계에 다다랐는지 버럭 화를 냈다.

" 저 분은 네 놈이 감히 우러러 볼 수 조차 없는 분이다. 네 못난 감정 하나 조차 그리 제대로 감추지도 못할 거면 저 분 가까이 얼씬도 마라. 아니면 아예 이 땅을 떠나라."

" ...눈치채셨습니까."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훈장의 말에 두 귓볼이 타오르는 노을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 눈치 못 채는 놈이 천치다! 네 마음을 그리 대놓고 다니는데 그 누가 모르겠느냐! 네 아비와 네 가문을 생각해라. 경솔하게 허튼짓 할 생각일랑은 꿈에도 꾸지 말고."

" ...그런 생각 안 합니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커녕 생각조차 하기에도 버겁고 고귀하신 분이신데...

그저 바라만 볼 것입니다. 그저...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듯 올라오자 영후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에 이 타오르는 마음을 함께 흘려보내려는 듯이 그렇게...

***

동명골을 다시 새로 지었다지만 그렇기에 더 손이 가는 부분들이 있었다.

새로 만든 아궁이에 불은 잘 붙는지, 방 안에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은 없는지 이곳 저곳을 꼼꼼히 확인하고 난 후 세르샤는 상단으로 향했다.

몸은 고되었지만 발걸음만은 구름 위를 걷듯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의 곁에 있는 수하들 중 가장 측근인 아르샨은 세르샤의 걸음걸이가 사뿐할수록 두 다리가 착잡함에 무거워졌다.

" 저 여인들은 누군가. 단주의 방에서 나오는 듯 한데."

상단이 머물고 있는 객사 안으로 들어서자 멀리서 화려한 형형색색의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은 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 잘 모르겠습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기녀인 듯 합니다. 단주께서 방기(房妓, 고관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기녀)를 부른 걸까요?"

" 그럴리가. 아내의 해산이 코앞이다. 두 사람의 금슬 또한 흠잡을데 없지. 그런 그가 여인을 불러 즐기다니. 그리 보기엔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르샤의 말에 아르샨이 함께 온 휘하들에게 물러가라 눈짓했다.

" 세르샤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그렇습니다. 어찌하여 저 여인들이 여기까지 온 걸까요. 소인의 아둔한 머리로는 짐작 조차 하지 못하겠습니다."

기생들이 작은 점의 크기가 되어 멀어지자 세르샨은 단주가 있는 방문을 벌컥 열고 성큼 들어갔다.

" 세르샤님. 오늘도 외출하셨다 오신 것입니까."

유유자적 차를 코 끝으로 음미하던 단주가 세르샤를 보자마자 흠칫하더니 이내 표정을 싹 감추곤 태연하게 그를 맞이하였다.

"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것이 있네."

단주의 약삭빠른 표정을 놓칠 세르샤가 아니었다.

" 하문하시지요."

" 방금 전, 이 방에서 나간 기녀들 말일세. 대체 왜 이곳에 왔던 것인가."

" 그 여인들은 유월관 기생들이온데 저희 상단에서 보급하는 물품을 사고 싶다 하더군요. 그나저나 그 여인들이 기생인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참으로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단주가 허허 웃으며 농하듯 말했다. 그러나 찻잔에 비친 그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 ...그렇군. 알았네."

사실대로 얘기 하지 않을거라 짐작은 했던 바였다. 단주에게 캐물어도 알아낼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세르샤는 더 이상 묻는 것을 체념했다.

" 헌데 말일세. 나는 왜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 믿겨지지 않는지 모르겠군. 일부러 믿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일세.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세르샤의 경고였다. 이국 땅에서 허튼 짓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 세르샤님의 기우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모두 진실이오니 정 그러하시거든 유월관 기생들에게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기녀들이 직접 상단에 와 물건을 사거나 흥정하는 일은 드물다. 정 필요한 것이 있다면 기방의 아랫것들을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

유월관 기생들에게 직접 확인해보라 큰소리까지 치는 경우라면 딱 두 가지. 단주의 말이 참이거나 아니면 상단에 왔던 기녀들과 입을 맞추었거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나 단주의 성정으로 보나 자신의 예리한 감으로 보나 이 경우는 후자였다.

" 단주가 그리 확언하니 그리 믿겠다. 그러나 잊지말게. 그대가 왜 파사국을 떠나 조선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말일세."

" ...명심하지요."

단주의 방에서 나온 세르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르샨에게 말했다.

" 단주에게서 눈을 떼지 말게. 또한 상단에 드나드는 이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기록해두게. 그들이 누구인지, 상단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구입하는지까지도 말일세."

" 알겠습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 자꾸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단주의 말대로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과잉이기를,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랬다.

***

" 준비는 차질없이 되어가는가."

" 예."

서화의 질문에 한 상궁과 박 상궁이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답했다.

" 이번에는 이틀에 나누어 첫 날엔 선잠례와 친잠례를 함께 행하고 둘째 날엔 수견례와 조현례를 행하려 하네. 채상단과 잠실의 크기는 간소화 할 것이며 모든 절차 후에 행해지는 만조백관의 진하를 받는 것은 생략할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해주게."

" 예? 하오나 이는 내명부의 수장이신 중전마마께서 가례를 올리신 후 처음으로 내외명부를 이끌고 참여하시는 크나큰 행사이옵니다. 만약 규모를 줄이시고 간소화 하신다면 내외명부는 교태전의 힘이 약하다 생각해 중전마마를 무시하려 들 것입니다. 소인의 미천한 의려로는 중전마마의 입지가 굳건하심을 이번기회에 제대로 보여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박 상궁이 근심어린 표정을 짓자 서화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친잠례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의식이지 나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닐세. 또한 내외명부 사람들에게 얕보이지 않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말게. 나도 내가 어떤 자리에 앉아있는지, 이 자리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일세."

박 상궁의 걱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안다는 듯, 서화의 음성엔 확고함이 서려있었다.

서화는 여리여리한 떨기의 꽃같아 보여도 강단 있는 여인이었다. 휘어질 망정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 유약해 보여도 강인한 여인. 중전의 자리가 그 어느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리여야 한다 했던가.

서화는 어느새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있었다. 강하고 화려하게 꽃 피울 날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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