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47화 (47/83)

제 47화 - 작별이 없는 한 헤어짐 또한 없노니.

" 그대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이오?"

고규태의 부름에 방 안으로 들어선 자를 보자마자 영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소? 아니면 이 곳에 오는데 그쪽에게 일일이 허락을 구하고 알려야 하는 것이오?"

영후의 잔뜩 날 선 말에 심드렁한 어투로 상대가 맞받아쳤다.

" 이곳에서 한량처럼 있는 것을 보면 그대는 참으로 할 일이 없는가보군."

영후의 가시 돋힌 말에도 마냥 태평해 보이는 상대. 이를 보다 못한 훈장이 나섰다.

" 여기 있는 이 자가 네 놈보다는 말 귀도 훨씬 밝고 힘도 세서 여러모로 부리기 용이하거늘, 동명골 재건을 이리 빨리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자와 이 자를 따르는 수하들 덕분이다. 헌데 고마운 줄은 모르고 되려 성이라니, 네 놈의 못된 성질머리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하구나!"

사내를 옹호하며 되려 영후를 꾸짖는 훈장이었다.

" 그럼... 이 자가 동명골의 재건에 힘을 보탰단 말입니까?"

이번엔 서화가 고규태에게 물었다.

" 예. 듣자하니 눈발이 펑펑 날리는 날에도 수하들을 데리고 와 부지런히 일하였다 합니다. 조선인도 아닌 이가 이렇게까지 큰 수고를 해주다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 ..."

" 헌데 이 자가 마침 상단에 있다 하옵니다. 그러니 중ㅈ..."

" 스승님!!!"

훈장의 입에서 '중전마마'란 소리가 나오려 하자 영후가 목청을 높이며 이를 막아섰다.

웃전 앞에서 무례하게 큰 소리를 내는 경박함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멀뚱히 쳐다보는 훈장의 귓가에 손을 가져간 뒤 영후가 작은 목소리로 ' 그냥 마님이라 부르십시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라고 속삭이자 훈장은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음 말을 이어갔다.

" 그러니 마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이 자에게 맡기는 것이 어떠할런지요. 보아하니 모두 초면은 아닌 듯 하니 더욱 잘 된 일이 아닙니까."

" 저는 내키지 않습니다."

" 영후 네놈이 나설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마님께서 결정해야 할 일이야."

" 이 사내와 잠시 긴밀히 할 이야기 있습니다. 두 분,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서화의 청에 훈장과 영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와 서화를 방 안에 단 둘이 놔두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영후였지만 그의 팔을 잡아끄는 훈장의 손길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방 안에 단 둘이 남은 서화와 사내.

" ..."

" ..."

" 대체 이 곳엔 왜 있는 것이오. 파사국 상단에서 저번에도 그리 쫓겨다니더니 이번에도 도망온 것이오?"

" 아니오. 그 때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그런 것이니 곡해 마시오."

" 그럼 동명골엔 왜 있는 것이오? 행색을 보아하니 노비도 아닌 귀족 자제인 듯 한데 대체 이곳에서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한단 말이오?"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조선의 복식과는 달랐으나 황금빛 자수가 빼곡히 놓여진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 ...그대가 보고싶어서."

" 뭐요?"

사내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서화는 이내 그 속뜻을 이해하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보고싶었소, 향."

" 대체 이게..."

" 처음 만난 날 이후로 한 번도 생각 하지 않은 날이 없었소. 지난 번 이곳에서 우연히 재회한 후, 한 동안은 궐문 근처를 서성이다 동명골에 있으면 그대가 또 오지 않을까 하여 기다린 것이오."

" 나는..."

" 헌데 보시오. 그리 기다리다 보니 이렇게 다시 만나지 않았소?"

" 그런 말 마시오. 나는..."

" 알고 있소. 중전마마를 뫼시는 이라는 것도, 그 분을 따라 상궁이 되어 입궐하였다는 것도."

" ..."

어찌 알았을까? 향이 상궁이 되었다는 것을. 서화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렸다.

" 헌데 궁금한 것이 있소."

" ...무엇이 궁금하오?"

" 중전마마를 따라 상궁이 되어 입궐했다 들었소. 헌데 어찌 혼인한 아녀자가 궁인이 될 수 있는 것이오? 지난 번에 보니 사람들이 마님이라고도 부르던데."

아뿔사. 자신이 세르샤에게 혼인한 사실을 이야기했던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걸 어쩐다...

" 그..그건 궐 안의 여인들은 모두 주상전하의 소유이기 때문이오. 관례를 통해 궁녀들은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게 되는데 상궁도 궁녀이므로 혼인한 것이나 진배없소. 허나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엔 무리가 있어 그저 혼인하였다 말한 것이오. 그리고 마님이라 한 것은 그들이 내가 중궁전에서 나온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소. 이 모든 것은 주상전하의 뜻임을 그들에게 알리고자 한 중전마마의 의중을 따라 그리할 수 밖에 없었소."

" ...그렇군."

세르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그제서야 한 숨 돌린 서화였다.

'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고 그리 말하였건만...이리 계속 마주치게 될 줄이야...'

속이 타들어가는 서화의 마음은 짐작도 못하는 세르샤는 자신과 수하들이 파사국 상단을 통해 교태전 내탕고에서 나오는 자금을 받아 동명골에 필요한 것들로 바꾸어 공급하겠다 하였다.

" 그것을 정말 그대가 할 수 있겠소? 또한 그런다 한들 내가 무슨 수로 그대를 믿을 수 있단 말이오?"

" 파사국의 상인들은 상도를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오. 계약을 하면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지.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계약서를 쓰겠소."

세르샤에게서 비장함 마저 묻어나는 진지함이 풍겼다.

" ...좋소. 허면 대사성 대감을 통해 매 초하룻날 상단에 기별을 넣겠소."

" 알겠소. 헌데 대사성 대감이 누구요?"

" 밖에 훈장과 함께 있는 이가 대사성 대감이오."

" 호위무사라더니?"

" 그것도 맞소. 궐에서 나올 때면 대사성 대감이 호위를 해주는 것이오."

아주 거짓은 아니었기에 그리 둘러대었다.

" 그렇군. 좋소. 그를 통해 연통주시오."

원하는 바를 달성했다는 듯이 만족스런 웃음을 짓는 세르샤를 마주하는 서화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 ...대체 이렇게까지 우리를 돕는 연유가 무엇이오? 이리 한다 하여 그대가 얻는 것이 있소?"

" 장사치라면 응당 득을 따지고 쫓는 것이 마땅하나...이렇게라도 나와 그대의 인연이 끝이 아님을 위안삼고 싶어 그렇소."

" 그건 헛수고요. 나는 이만 가봐야겠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앞으론 대사성 대감을 통해 전하시오."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서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세르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작별 인사도 고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 ... 우린 또 만나게 될 것이오."

홀로남은 세르샤가 중얼거렸다.

' 우리는 아직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으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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