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화 - 너무 오래 과인을 애태우게 하지 마시오.
" 그깟 사내 마음 하나 휘어잡지 못해 여지껏 뒷방신세라니, 참으로 못나셨습니다!"
좌의정 최경주가 최 귀인을 매섭게 흘겨보며 언성을 높였다.
대왕대비전과 대비전 문지방이 닳아 문드러지도록 드나들며 어렵게 얻은 합방일이었건만.
한 동안 아무말이 없어 무사히 합방을 한 줄 알았다. 그러나 회임소식이 들려와도 이미 한참 전에 들려오고도 남았어야 함에도 아무런 기별이 없자 인내심이 바닥난 좌의정이 최 귀인의 처소인 서월당에 들어섰다.
합방을 무사히 치뤘는지 묻는 아비의 말에 아무말도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여식을 보곤 실패했음을 짐작했다.
그의 연이은 추궁에 최 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임금이 자신을 거부하였다는 것이었다.
" 육신을 합하여 잉태를 하는 것은 금수들도 하는 것입니다. 헌데 어찌 그리 쉬운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 교태전의 그 계집이 전하를 단단히 홀려놓았는데 제가 무슨 수로 전하의 마음을 돌린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저더러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조용히 살라 겁박까지 하셨단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분한지 최 귀인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라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좌의정에게 토로했다.
' 감히 나를 능멸하고 내 딸을 능멸해?'
좌의정은 대놓고 자신의 여식을 소박놓는 것도 모자라 조용히 뒷방이나 꿰차고 앉아있으라 비수를 꽂은 윤에 대해 분노하며 속으로 칼을 갈았다.
" 내 너를 반드시 교태전의 자리에 앉힐 것이다."
존대를 하던 아비의 입에서 나온 비장함 가득한 목소리였다.
" 아버님."
" 내 기어코 너를 중전으로 만들 것이야!!"
" 전하께서 저를 돌 보듯 하시는데 어찌 제가 그 년을 쫓아내고 중전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 쫓아내어도 안된다면 죽여야지. 임금께서 너를 중전으로 삼지 않겠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신다면 새로운 왕을 세우는 수 밖에."
" 예?"
아비의 입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말에 최 귀인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서화, 그 년이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음에 어찌되든 상관없다지만 임금을 바꾼다니...
아비에게 재차 물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섬뜩이는 첨예한 좌의정의 눈빛에 두려워진 최 귀인은 물으려던 말을 다시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말았다.
***
살을 에이는 듯한 매서운 계절이 지나가고, 두껍게 꽁꽁 얼어붙어있던 얼음이 물 웅덩이를 조금씩 만들며 녹기 시작했다.
윤과 서화는 추운 겨울에도 아랑곳 않고 햇살이 가장 따뜻한 때를 골라 이따금씩 함께 후원을 거닐기도 하였고, 눈보라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만큼 휘몰아칠 땐 뭉근한 교태전 안에서 복녕이의 재롱을 보거나 함께 시를 써 주고받기도 했다.
" 중전의 시를 짓는 솜씨가 이리 조예 깊은 줄은 몰랐소."
" 스승의 가르침이 탁월한 덕분이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사람. 윤의 칭찬에 서화가 봉선화 꽃잎처럼 붉게 뺨을 물들이며 답했다.
" 대사성의 가르침이 그리 대단하오?"
" 예. 스승이 세상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며 익힌 다양한 학문과 경험을 통해 신첩의 좁은 안목과 견해를 넓혀주고 있사옵니다."
" 그렇소?"
" 예. 법국(法國, 오늘날 프랑스)에는 끝이 매우 뾰족한 궐이 있다 합니다. 또한 밥이 아닌 아궁이에 넣고 구운 커다랗고 둥근 만두 비슷한 것을 먹는다 합니다."
" 희한하군."
" 대사성 대감이 법국에 있을 적에 조선에서 가져간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는 것을 보고는 법국인들이 이를 참으로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합니다."
" 그렇군."
" 또한 대사성 대감이 화란국에서 가져온 식물도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안엔 조선에 없는 꽃과 나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전하께서도 보시면 즐거우실 것입니다."
" 중전께서 이리 배우기를 즐기시니 보기 참 좋소."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던 그 때였다.
쪽.
임금의 용안이 순식간에 서화의 얼굴 가까이 다가오더니 여리여리한 서화의 턱끝을 움켜잡고선 서화의 입술 위에 따뜻한 무언가가 살짝 내려앉았다.
맞닿은 입술의 살갗이 아궁이에서 거침없이 타오르는 마른 장작 위의 뜨거운 불씨 같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윤은 아쉬운 듯 입술을 달싹이며 서화에게서 멀어졌다.
" 저..전하!"
느닷없는 입맞춤에 서화가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 배우는 것은 좋으나 그 놈의 대사성 대감이란 소리는 그만 할 수 없겠소? 중전의 입에서 영후놈 이야기가 쉴새없이 나오니 내 죽마고우에게 시샘이 나서 말이오."
" 전하..."
" 과인도 각국에서 사신들이 가져올 때마다 진상 받은 식물도감은 물론이고 진귀한 서책들이 많이 있소. 중전께서 보고 싶다면 내 지금 당장에라도 가져오라 이르겠소."
꽃내음을 풍기며 윤의 앞에 앉아 새로 배운 것들을 나열하며 이야기를 하는 중전의 모습이 그리 아리따울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있었으니.
민영후.
강샘이 일었다. 하여 임금의 체면도 잊은 채 중전은 과인의 것이오, 라고 상기시켜주기 위해 입을 맞추는 것도 모자라 중전이 혹여 자신의 벗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노심초사에 자신도 매우 귀한 서책들이 많다며 체통을 구긴 윤이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가 정녕 차가운 시선으로 마음에 비수를 꽂던 이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가감없이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임금의 모습에 서화의 심장은 또다시 속절없이 두근거렸다.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하였던 과인의 말, 아직 기억하고 계시오?"
윤이 물었다.
" 전하의 귀한 말씀을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나이까. 신첩, 모두 다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 중전께서 과인에게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날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소."
" ..."
"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끈기있게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 ...알고 있사옵니다."
" 과인은...오직 중전밖에 없소."
" 신첩에게도 오직 전하뿐이십니다."
서화도 슬며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비추었다.
그러자 윤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마음 구석에 숨겨두었던 본심을 꺼내었다.
" 그러니 너무 오래 과인을 애태우게 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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