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42화 (42/83)

제 42화 - 또다시 만난 인연

" 아이고 나리! 어찌 이리 고약한 날씨에 예까지 걸음하셨습니까요."

추운 날씨에 겨우 얇은 옷가지 한 장을 걸치고선 커다란 지게를 나르던 사내가 영후를 발견하고선 한달음에 달려와 허리를 숙이며 아는체를 했다.

" 나와 함께 온 마님께서 추위에 아랑곳 않고 애쓰는 자네들에게 국밥 한 그릇씩 먹이고 싶으시다 해서 말일세. 이보게들, 잠시 쉬었다들 하게나. 여기 고기를 듬뿍 넣은 국밥을 가져왔네."

" 예에? 이리 귀한 것을... 아이고 마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금육의 성질이 강한 조선에서 더욱이 형편이 어려운 백성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사내가 서화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이를 보던 다른 일꾼들 역시 서화를 향해 하던 일을 멈추고 절을 했다.

두 상궁들까지 데리고 온 터에 오늘은 남장이 아닌 양반가의 아녀자 복장을 하고 온 서화와 두 상궁들. 얼굴을 가리고자 내외용인 장옷을 머리 위로 넓게 감싸고 있던 서화가 이를 걷어내었다.

그러자 수수한 차림에 가지런히 빗어 쪽을 진 서화의 모습이 드러났다. 평범한 행색이었음에도 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귀함에 일꾼들이 모두 넋을 잃은 모습으로 서화를 바라보았다.

" 다들 추운 날씨에 고생들이 많네. 넉넉히 가져왔으니 걱정말고 배불리들 드시게."

서화가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서야 일꾼들은 정신을 차리고 주렸던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 아이들은..."

" 그쪽에도 한 솥 보내었으니 지금쯤 다들 먹고 있을 것입니다, 중전마마."

동명골의 아이들을 찾는 서화의 목소리에 박 상궁이 냉큼 대답하였다.

" 이곳에선 날 그리 부르지 말래도. 입 단속 잘 하여야 한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서화가 박 상궁을 향해 일갈하였다.

장시간 동안 추운 날씨에 제대로 챙겨입지도 못한 탓에 꽁꽁 얼어있던 일꾼들의 얼굴이 국밥을 먹자 점차 발그레한 기운이 돌면서 속을 녹여주었다.

이들을 둘러보던 서화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춰섰다.

" 어찌하여 자네는 먹지 않는 것인가. 혹시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것인가."

앙상하게 마르다 못해 얼굴의 광대뼈가 움푹 패이고 두 눈동자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에 드리운 사내가 눈 앞의 국밥을 허겁지겁 먹을만도 한데 이를 먹지 않고 한 곳에 밀어놓고선 그저 다른 이들이 먹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그런 사내가 걱정되어 서화가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 그런 것이 아니옵고..."

" 이 추운 날에 일을 하려면 속이 든든해야 하네. 아픈 것도 아니라면 어찌 먹는 것도 마다하고 이리 있는 것인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서화가 식어가는 국밥 위에 뜨끈한 국물을 조금 더 얹어 다시 사내에게 건네었다.

" ...집에 가져가 먹으면 아니되겠습니까."

어렵사리 사내의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 아니될 건 없네만...어찌하여 그러는 것인가."

" 집에...다섯 살, 세 살 먹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들 어미는 이 년 전 마을에 역병이 돌아 저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국밥을 보니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애들이 눈에 밟혀서 그만..."

사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모습은 서화의 가슴마저 먹먹하게 만들어 버렸다.

" 향아."

" 예, 마님."

이번에는 제법 눈치있게 박 상궁이 '마님'이라며 서화의 말에 응답하였다.

" 여기, 솥에 남아있는 음식들을 모두 담아 이 사내에게 내어주거라."

" 예?"

" 국밥 한 솥 더 끓여 집에 식솔이 있는 자들에게도 그들의 몫까지 넉넉히 내어주거라. 혹 모자라다면 망설이지 말고 더 내어주고."

" 마님!!"

서화의 말에 사내가 눈이 켜켜이 쌓인 바닥에 얼굴을 묻듯 바짝 엎드리며 눈물을 흘렸다.

" 이러지 말고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게."

" 참으로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서화가 사내의 투박하고 거친 나무토막 같은 두 손을 맞잡으며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

" 자네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힘써주는 덕에 이 나라가 이렇게 여지껏 잘 버텨올 수 있었네. 자네들의 고통은 나라의 아픔이자 슬픔이요, 자네들의 상처는 이 조선의 눈물이네. 자네들이 무탈하고 근심이 없어야 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네. 앞으로는 자네들 모두가 외면당하는 이 없이 잘 살 수 있도록 전하께서 그리 하실 것이야."

" 참말이십니까? 정녕 전하께서 저희같이 보잘것 없는 것들을 살펴주실 것이란 말입니까?"

" 우리는 모두 전하의 백성이네. 전하께서는 소외받는 이 없이 모두를 고르고 평등하게 살피신다네."

여인된 도리로서 지아비를 조용히 뒤에서 내조하는 서화만의 방식이었다.

밥을 먹자 뱃고래가 든든해진 일꾼들의 목청이 점차 우렁차지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서화 역시 느지막히 영후와 두 상궁들과 함께 국밥 한술을 뜨려 할 때였다.

" 여기서 풍겨 나오는 고깃국 냄새가 저 아래 마을까지 내려오던데 우리도 좀 먹읍시다?"

" 여기 이 놈들 좀 보시오, 형님. 다들 얼마나 쳐먹었는지들 배가 함지박만 하오!"

" 우리는 이렇게 굶고 있는데 늬놈들은 이 뽀얀 국물에 밥말아 고기까지 척척 얹어 먹는단 말여??? 이런!!"

어디선가 나타난 한 무더기의 무뢰배들이 나타나 다짜고짜 상을 엎으며 횡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 이놈들!! 이게 어떤 음식인데!!!"

" 이 늙은 영감은 또 뭐야? 저리 비켜!"

" 윽!"

무뢰배들의 몰상식한 행동을 저지하려던 한 노인을 바닥으로 패대기치듯 거칠게 밀어 넘어뜨리자 보다못한 영후가 나섰다.

"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떠나라."

" 오호~? 이 샌님처럼 생긴 양반 나으리는 누구쇼? 어라? 뒤에 마님과 몸종들까지 있네? 마님을 닮아 그런가,  몸종들 인물도 제법 반반하니 안는 맛도 꽤나 좋을 법 같은데.."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가 여럿인 사내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서화와 두 상궁을 바라보았다.

" 닥쳐라, 이놈들! 먹을 것을 가지러 왔다면 음식은 내어주마.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썩 물러가라!"

서화가 두 상궁의 앞에 서 이들을 보호하며 엄하게 호통쳤다.

" 아이고..마나님 성격이 어찌 그리 거치시나? 그래가지고선 서방이 내자에 정 못붙이고 집 밖으로만 돌겠구만. 맨날 밖에서 고생이라 이 양반 나으리의 얼굴이 이리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얄상하고 파리한가보오?"

그 사내는 서화와 영후가 부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 그 입 닥쳐라. 더 이상의 무례는 용서하지 않겠다."

영후가 검집에서 검을 빼들며 세 여인을 보호하려들자 무뢰배들이 피식 웃으며 거리를 점차 좁혀왔다.

" 이보시오, 양반 나으리. 혼자서 이 많은 사람들을 어찌 상대하려 그러시오? 육신 멀쩡히 돌아가고 싶으면 그 칼 내려놓고 뒤에 여인들이나 내놓으시지."

" 이것 놓아라!!!"

순식간에 무뢰배들이 여인들의 팔을 낚아채 저항하는 이들을 억센 힘으로 짓눌렀다.

서화마저 이들 중 한 명에게 손몪이 잡힌 채 거칠게 저항하고 있었다.

' 중전마마!'

영후는 차마 내지 못한 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서화를 구하려 했지만 어느새 그를 둘러싼 거친 사내들에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한 무리의 요상한 복장을 한 사내들이 나타나더니 커다란 반월도를 허리춤에서 꺼내 휘두르며 단숨에 무뢰배들을 제압하고는 들러붙어있던 사내들에게서 여인들을 구출해내었다.

무뢰배들을 모두 바닥에 꿇리고 난 후 요상한 복장의 무리들 중 한 명이 서화를 알아본 듯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서화에게 물었다.

" 향, 괜찮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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