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화 - 중전을...은애하오
서화와 마주 앉은 윤의 시선이 중전에게서 떠나갈 줄을 몰랐다.
며칠 새 수척해진 서화의 얼굴을 보고있노라니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 중전의 얼굴이 못 본 사이 수척해진 것 같소. 어디 아프오?"
서화가 어찌 지냈을지 뻔히 알면서도 윤은 모르는 척 물었다.
" 아닙니다, 전하. 지난 밤 쉽게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였더니 조금 곤하여 그런 듯 하옵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송구하옵니다."
서화는 애써 태연하게 말하였다.
"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보신할 수 있는 음식들을 올리라 해야겠소."
" 괜찮사옵니다. 신첩 그간 무탈하게 잘 지내었사옵니다. 하오니 염려치 마시옵소서."
서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이 말했다.
" 잘 지내었다? 정녕 그 말이 참말이오?"
" ...예, 전하."
다른 여인을 품으신 것이 정녕 사실이냐고...
다른 여인에게 전하의 마음을 내어주신 것이냐고...
묻고싶었다.
알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중전의 자리니까.
실토하지 않는 서화를 바라보며 윤이 한숨을 쉬었다.
" 과인은...잘 지내지 못하였소."
뜻밖의 말에 서화가 눈이 커졌다.
" 예? 하오면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있으신 것이옵니까?"
지아비가 잘 지내지 못하였다 하는 말에 금세 걱정가득한 얼굴로 묻는 서화였다.
" 그런 것이 아니라..."
" ...?"
" 중전이 보고싶어서 말이오. 참으로 보고싶었다오."
" 예?"
" 교태전으로 가고싶은 마음이 어찌나 굴뚝같던지. 임금의 자리란 참으로 눈치보아야 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 많은 답답한 자리라는 것을 내 이번에 뼈저리게 다시 한 번 느꼈소."
윤이 하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 중전. 과인이 졌소."
이번엔 또 무슨 말인지. 서화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있자 윤이 입술을 달싹였다.
" 중전을 여인으로 볼 수 없다 했던 말 말이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였고 왕언의 무게, 그 정도를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나 지금이라도 그 말...다시 물러도 되겠소?"
" 예?"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윤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 중전을...은애하오."
" ..."
" 과인의 굳게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어느새 중전이 그 안에 자리하게 되었단 말이오. 여태까지 중전에게 여러모로 상처주어서... 부끄럽고 미안하오."
임금은 무치(無恥)라 하였다. 그런 천하의 지존이 스스로를 굽혔다.
" 전하..."
" 최 귀인과는...결론부터 말하자면 합방하지 않았소. 합방하지 아니하였으니 합궁도 없었소. 과인은 그 날 밤 상선과 궁인들만 귀인 처소에 두고 강녕전으로 갔다오. 궁안팍으로 과인을 주시하고 있는 눈들이 많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최 귀인과 합방한 것으로 믿게 만들었을 뿐, 실은 중전을 보러 교태전으로 오고 싶었다오."
진심이었다. 언젠가부턴가 교태전으로 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워졌고, 서화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행복하게 느껴졌으니까.
" ..."
알지 못했던 사건의 전말에 서화의 두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 일부러 교태전에 오는 것도 시간을 두었다오. 임금의 자리란 내명부를 모두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과인이 최 귀인과 합방하자마자 중전을 찾는다면 이는 과인과 중전의 위신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판단에 참고 또 참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온 것이오."
" 전하..."
윤의 진심어린 말에 서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서화의 두 손을 윤이 꼭 맞잡으며 말했다.
" 앞으로 중전을 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리다. 과인을 사모한다 했던 중전의 말, 아직도 유효한 것이오? 우리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건 어떻소. 아직...늦지 않았다면 말이오."
눈 앞에 한 마리의 나비같은 여인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슬픔을 홀로 삼키며 늘 자신의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던 여인.
자신을 사모한다며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던 여인.
이제는 윤이 그 여인을 평생 마음에 품고자 하였다.
최 귀인의 처소에 들었던 날, 온 몸이 뜨겁게 들끓어 솟아오르는 욕정을 분출하기 위해 여인생각이 간절했었다.
평소와 같았다면 시침 들 여인을 불러오라 했겠지만 서화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이상 더 이상 서화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도 않은 채 서화를 먼저 품을 수도 없는 노릇에 밤새 홀로 커다란 방에서 어찌나 애를 먹었던지...
그리고 지금은 서화의 마음이 부디 돌아서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중전?"
아무말 없이 윤의 품에 안겨 고개를 숙인 서화를 나지막히 불렀다.
" 신첩...전하를 사모하나이다. 처음 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그리고 앞으로도 신첩의 마음엔 전하뿐이옵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윤의 귀에 똑똑히,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그제서야 윤은 긴장된 마음을 풀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 고맙소. 늦지 않았다 말해주어서."
"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첩에게 이리 큰 전하의 마음을 내어주셔서..성은이 망극하나이다."
" 우리, 앞으로 행복해지십시다. 중전과 과인을 닮은 아이들도 여럿 낳아 다복하게 살고싶소."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서화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아이. 전하를 닮은 아이...
벌써부터 마음이 포근해졌다. 임금과 중전의 대화를 장지문 밖에서 듣고 있던 궁인들의 얼굴에도 해사한 꽃들이 피었다.
***
윤과 서화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시간은 흘러 살을 에이는 차가운 바람과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눈의 계절이 찾아왔다.
" 이리 추운데 어찌 또 궐밖을 나가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러다 고뿔에 걸리시면 어쩌시려고요."
영후가 백성들이 어찌 겨울을 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서화를 만류했다.
" 추위가 무슨 대수입니까. 이러한 짖궂은 날씨에도 저는 이렇게 따뜻한 방 안에서 배불리 먹으며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바깥에는 아직도 추위와 맞서가며 고생을 하는 백성들이 있으니...따뜻한 국밥이라도 먹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박 상궁과 한 상궁과 함께 대동하여 나갈 참이었다. 백성들에게 국밥을 나누어주려면 손은 많을 수록 좋으니까.
" 대사성 대감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중전마마. 다른 날을 기약하시고 오늘은 궐에 계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 상궁이 옆에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 이것이 어찌 미룰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인가. 내 직접 동명골의 재건 모습도 보고 백성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하고자 하니 한 상궁은 어서 옷을 내오게."
단호한 서화의 말에 두 상궁과 영후는 조용히 한숨을 삼키며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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