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화 - 흑모란이면 족한 것을...
" 전하!!!"
" 소란 떨 것 없다."
윤이 침착한 표정으로 임 상선의 소란스러움을 저지하자 임 상선이 윤에게 가까이 와 낮은 목소리로 조곤거렸다.
" 전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어의를 불러올까요."
" 그럴 것 없다. 몸이 곤하여 그런지 어서 돌아가 쉬고 싶구나."
" 그럼 연(輦)을 가져오라 이르겠나이다."
" 과인이 최 귀인을 소박놓았다는 사실을 궁 안팍으로 자랑질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과인은 내금의장과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침전으로 돌아가겠다. 임 상선, 자네는 최 귀인의 처소에 나머지 궁인들과 함께 아침까지 지키고 있다 해가 뜨면 돌아오도록 해라."
" 예에? 그건 아니될 말씀이옵니다, 전하. 이리 옥체가 미령하시온데 어찌 소인이 전하의 곁에서 떨어질 수 있겠나이까."
" 거 참!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자네도 갈수록 고집만 느는군! 내금의장과 단둘이 돌아가겠다. 상선은 이곳에서 해가 뜨는 것을 반드시 보고 돌아와야할 것이야. 이건 어명이다. 시운아, 가자."
매정하리만치 윤은 애타는 임 상선의 마음을 외면한 채 시운의 어깨에 의지하여 침전으로 향했다.
" 전하."
" 시운이 너 마저 잔소리를 하려는게냐. 조용히 해라. 눈에 띄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윤을 부르는 시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무엇을 말할지 다 안다는 듯 윤은 고개를 내저으며 시운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 안다. 시운이 네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이곳은 듣는 귀, 보는 눈이 사방에 깔려있으니 침전으로 가자."
이제는 등줄기에 굵은 식은땀까지 흘러내렸다.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채로 차가운 바깥바람을 맞부딪혀가며 열심히 걸음을 재촉하는 윤의 얼굴에도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침전인 강녕전으로 무사히 돌아온 두 사람.
침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윤은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숨을 내쉬며 금침 위에 몸을 뉘어버렸다.
" 허억...헉..."
그런 임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시운이 윤의 곁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 전하, 대체 최 귀인 처소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 별 일 없었다."
" 혹 드시지 않으시던 음식을 가까이 하셨습니까."
" 그리하지 않았다."
" 잠시 소신이 옥체에 손을 대도 되겠습니까."
윤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운이 조심스레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붙여 임금의 손목에 가져다 대었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엄청난 속도로 자맥질하는 임금의 맥이 느껴졌다.
" 전하,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에 열이 도십니까."
" 그러하다."
신체에 탈이 나거나 병색이 도는 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 하오면 옥경(玉莖)에도 불편함이 있으신지요."
" 그렇다."
" ......"
전에도 이러한 맥을 가진 이를 본 적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이가 감히 임금께 이런 짓을...
" 어찌 그러느냐."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말 없이 맥을 짚고 있는 시운을 보며 윤이 물었다.
" 이전에도 전하와 유사한 맥을 가진 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 헌데?"
" 전쟁을 치룬 패국의 여인들이 노비나 노리개로 승국에 끌려가 그 나라의 사내들에게 안길 때 거칠게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쓰는 것이 있사옵니다. 하온데 이를 복용한 여인들의 맥과 전하의 맥이 같사옵니다."
" 무어라?"
" 이 약재를 복용한 여인들은 성격이 온순해지고 혈이 왕성하게 돌아 숨이 거칠어지고 육체가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근자에 들어 이것이 은밀히 조선으로 유입되었고 소리없이 퍼져 사대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이라 들었사옵니다."
" 허면...좌의정과 최 귀인이 벌인 짓이겠군."
"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 좌 의정이 바라는 것은 최 귀인의 회임일 것이다. 그렇기에 대비전과 대왕대비전을 오가며 과인과 최 귀인의 합방을 주도한 것이겠지."
" 만일 그렇다면 전하께서 이를 드시지 않는 이상 그 효능이 발휘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 감히 전하의 수라상에 이런 불미스러운 짓을 한단 말입니까. 수라간 궁인들을 당장 잡아들여 추국하여야 하옵니다, 전하."
" 확실한 증좌가 없는한 진실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 하오면 이 사단의 배후에 있는 이를 어찌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 차차 방도를 찾아야지. 은밀히 지켜보며 찾아낼 것이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검은 세력을 찾아내어 발본색원하겠다 다짐하는 윤이었다.
***
" 중전마마. 무엇을 그리고 계시옵니까."
박 상궁이 커다란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서화에게 물었다.
임금께서 최 귀인과 합방을 한 건 닷새 전. 여태까지 교태전으로 걸음 한 번 하지 아니하시는 임금이시다.
혹여 임금의 총애가 최 귀인으로 기운 것은 아닌지 수군거리는 교태전 나인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한 박 상궁은 아무말 없이 자수를 놓거나 서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서화를 조용히 곁에서 지켜보며 씁쓸한 감정을 목구멍으로 애써 삼켰다.
무어라 말씀이라도 하시면 좋으련만. 전하께서 교태전으로 납시어 중전마마의 마음을 달래어주시면 좋으련만.
" 모란을 그리고 있다네."
종이엔 커다란 모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 하오면 채색하실 수 있도록 붉은 안료를 가져오겠나이다."
" 그리할 것 없다."
붉게 칠할 수 있도록 안료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박 상궁을 말린 건 필요없다 말하는 서화의 단호한 말 한 마디였다.
" 예? 어찌..."
" 화려하게 칠을 한다하여 나아질 것이 무에 있겠느냐. 흑모란이면 족한 것을..."
모란은 꽃들의 왕이요, 중전의 꽃. 아무리 꽃을 화려한 색으로 칠한다 해도 중전인 서화 자신은 빛 없는 흑모란에 불과하다며 자신의 신세를 이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었다.
"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중전마마."
박 상궁이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서화는 붓을 내려놓고 활짝 열린 창밖을 내다보았다.
' 내가 자만하였다. 전하께서 내게 마음을 점차 열어 가까이 다가오시고 있다 생각하였어...'
자신보다 전하의 승은을 먼저 입은 후궁에게 시기를 해선 안 되었다. 그러나 자꾸만 가시박힌 듯 콕콕 쑤시는 가슴이 감당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슬픔에 젖어들어가던 그 때...
" 주상전하 납시오!"
임 상선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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