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39화 (39/83)

제 39화 - 소첩 또한 전하의 계집이옵니다.

" 최 귀인."

자신을 부르는 임금의 음성에 녹아든 거친 숨소리에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조신하게 대답을 하는 최 귀인.

" 예, 전하."

드디어 임금께서 자신을 품고, 오늘 밤을 빌어 임금의 씨를 잉태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할 원자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전율에 적셔진 상태였다.

" 과인에게 여인의 삶을 바라지 마라."

" 예?"

윤의 말을 알아차리지 못한 최 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과인은 최 귀인을, 안지 않을 것이다."

약 기운에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거친 숨을 고르는 와중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최 귀인의 두 눈을 바라보며 강하고 건조한 말 한 마디로 최 귀인을 무너트렸다.

" 어찌...소첩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청천벽력같은 임금의 말에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휘청이며 윤에게 물었다.

" 과인은 후궁에겐 힘을 실어주지 않을 생각이다."

" 소첩이..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소첩..전하를 사모하옵니다. 소첩 또한 전하의 계집이온데 어찌하여 이리 저를 모질게 외면하시는 것입니까.."

억울하였다. 교태전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시면서 어찌하여 자신에겐 이리 매몰차게 소박을 놓는 것인지. 억울하고 분하여 꽉 옭아 쥔 두 주먹의 안쪽 살갗이 손톱에 깊게 패여갔다.

" 그것 참 희한하군. 과인은 최 귀인의 처소에 걸음한 것이 이제 겨우 두 번째요, 제대로 말 한 마디 나누어 본 적이 없거늘, 어찌 최 귀인은 과인을 사모한다 말을 하는가. 최 귀인이 과인을 마음에 품을 틈이 과연 있었느냐는 말이다."

" ......"

" 과인을 사모한다라... 임금의 자리를 사모하는 것이겠지."

최 귀인이 초조함에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 아비를 잘 둔 덕에 이리 궁궐에 들어와 임금의 후궁이 되고, 단번에 귀인의 품계까지 오른 정도면 여인으로써 분에 넘치는 출세이거늘. 어찌 과인에게 최 귀인을 품으라는 요구까지 하는 것이냐."

" 소첩은...전하의 여인이니까요. 중전마마만이 전하의 여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저도, 조 귀인도 모두 전하와 국혼을 치루고 합환주를 마신 어엿한 부인이옵니다. 헌데 어찌하여 중전마마만 은애하시고 후궁들은 이리 외면하시는 것입니까..."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구슬픈 표정을 짓는 최 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이 입을 열었다.

" 최 귀인. 혹 근자에 저잣거리에서 오르내리는 말이 무엇인 줄 아느냐."

" ...모르옵니다."

" 과인과 최 귀인의 금슬이 그리 대단하다 하더군. 주막의 오고가는 나그네들은 물론 듣자하니 도성 안에 온통 최 귀인이 과인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말야. 최 귀인은 이 얼토당토 않는 소문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아느냐."

시운과 잠행을 나갔을 때 주막에서 두 사내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은밀히 어명을 내려 이 근거없는 소문의 출처를 파악하라 하였던 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운이 궐로 돌아와 도성 안엔 온통 최 귀인과 임금의 금슬이 원앙도 저리가라 할 정도라. 곧 최 귀인이 아들을 낳으면 세자가 되어 훗날 임금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는 말과 함께 벌써부터 좌의정에게 줄을 서려는 자들이 혜화문 바깥까지 늘어서 있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 소문의 배후는 쉽사리 짐작이 가는 바.

' 좌의정.'

" 최 귀인은 참으로 대단한 아비를 두었군. 내 이번 일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하지만 좌의정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듯 하구나. 좌의정이 그리 사리분별 하지 못한 채 이리 나설수록 과인은 최 귀인으로부터 더 멀어진다는 것을."

좌의정이 원하는대로 따라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최 귀인을 실제로 품는다면 좌의정은 부원군이라도 된 마냥 양 어깨를 더 으스대며 권세를 휘두르려 들 터.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윤의 말에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는 최 귀인.

이리 모진 박대도 없었다. 분통함에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누르며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 그리고 더 이상 아비를 이용하여 과인을 조종하려 들지 마라. 모르는 척 따라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과인이 깊은 궐 안에 홀로 있다 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생각하지 말거라."

더 이상 숨을 평온하게 고를 수가 없었다. 자꾸만 거세지는 심장의 요동질과 하단에서 굳세게 힘을 과시하며 위용을 뽐내는 것으로 인해 더 이상 자리보전을 할 수 없었다.

윤이 일어나 몸을 돌려 문을 나서려 하자 최 귀인이 재빨리 바닥을 딛고 일어나 임금의 앞을 가로막았다.

" 전하. 이대로는..흑..못 가십니다."

" 비켜라."

최 귀인이 거칠게 자신의 당의 고름을 풀어헤치고 벗어던지더니 금박이 수놓인 스란치마, 속저고리까지 서슴없이 벗었다. 그러자 속살과 가슴을 옹골지게 모아 묶은 속치마만이 남게 되었다.

그 때였다.

최 귀인이 임금의 어수를 잡더니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다 대고는 말하였다.

"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전하의 것이옵니다. 전하만을 위해 이리 가꿔온 것이란 말입니다. 이럼에도 정녕...소첩을 품고 싶지 않으십니까."

온 몸의 향유를 발라두었기 때문에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면 살에 스며든 향유가 더욱 잘 발향될 것이라 생각한 최 귀인의 계략이었다.

" 최 귀인. 더 이상 임금을 능멸하지 마라. 더 이상의 불경한 짓은 용서치 않을 것이니 당장 그 불쾌한 몸뚱아리를 치워라!"

윤이 진노하여 두 눈을 번뜩이며 최 귀인에게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최 귀인이 몸을 움찔거리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 최 귀인. 지금 그 자리도 최 귀인에겐 과분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야. 그 자리까지 내놓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지내야 할 것이다. 자네와 좌의정의 체면을 생각해 오늘 밤은 자네와 합방한 것으로 해두지. 최 귀인 역시 오늘 있었던 일은 함구해야 할 것이다. 좌의정에게는 특히. 혹여 발설하여 과인의 귀에 들어오는 날엔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물론, 목숨도 온전치 못할 것이야."

윤의 차갑디 차가운 말에 얼음처럼 굳어버린 최 귀인을 뒤로 한 채 최 귀인의 처소를 나섰다.

" 전하..! 어찌 침수드시지 않으시고 다시 나오신 것입니까."

임 상선이 윤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한달음에 뛰어왔다.

" 임 상선.."

털썩.

윤이 몸을 휘청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 전하!!!"

임 상선의 외침이 공기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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