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37화 (37/83)

제 37화 - 폭풍전야 [暴風前夜] (2)

"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할마마마."

찻잔을 들이키려던 윤의 손이 멈칫했다.

" 최 귀인의 처소인 서월당과 조 귀인의 처소인 동월당에 드셔야겠다 말씀드렸습니다, 주상."

" 소자, 아직 그럴 생각 없습니다."

" 허나 두 귀인 또한 주상의 여인들입니다. 임금의 자리는 무릇 모든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는 자리입니다. 또한 집안이 화목해야 바깥도 무탈한 법. 임금이 여인을 다루지 못해서야 어찌 더 중하고 큰 일인 국사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 허나 할마마마. 소자, 중전에게서 원자를 볼 때까지 후궁들의 처소엔 걸음하지 않겠다 윤허받지 않았사옵니까."

임금과 중전의 금슬이 좋은 것을 보고 대왕대비는 서화에게서 회임소식이 있을 때까지 후궁들과의 합방을 미루어도 좋다고 허락하였는데 이는 대왕대비 자신이 중전이었을적 늘 후궁들의 처소로 나도는 지아비를 보며 흘린 눈물자락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았기 때문에 정비의 자리에 있는 손주며느리가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에서였다.

" 그랬었지요. 압니다. 허나 이 할미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내일 당장 죽어도 여한없을 나이이지요. 다만 이 늙은이의 원이 있다면 그저 눈 감기 전에 주상을 빼닮은 증손주를 안아보는 것입니다."

" 그래요, 주상. 이 어미도 어서 하루라도 빨리 주상을 닮은 원자를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이리 할마마마께서 원하시는데 그 바램을 들어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자 큰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대왕대비의 옆에서 함께 거드는 대비. 왕실의 두 큰 어른들의 청에 윤의 마음이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소자, 절대 후궁들의 처소에 걸음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주상. 이 구중궁궐에 혈혈단신으로 들어와 여지껏 지아비와 따뜻한 정 한 번 나누지 못한 채 죽은 듯이 살아가는 두 귀인들이 딱하지도 않으십니까. 이번 만큼은 이 어미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주상이 아무리 싫다하신다 한들 말입니다."

" 소자는 중전에게서 원자를 볼 것입니다. 아직 중전의 춘추가 원자 생산에 있어 조금의 모자람이 없으니 중전에게서 적통 소생을 볼 것이옵니다."

" 참으로 너무한 말씀만 하십니다, 주상!"

대비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엔 까닭이 있었다. 좌의정 최경주가 대비의 친척이자 조 귀인의 아비인 현감 조석현. 그를 이용하여 대비를 끌어들인 뒤, 대왕대비를 설득하고 임금의 완고한 고집을 꺾고자 하는 것이 그의 계략이었다.

대비와 대왕대비의 힘을 빌린다면 귀인 마마들의 합방일을 택하는데 있어 관상감 교수도 어찌할 수 없이 웃전의 명을 따라야 하니 이보다 좋은 수는 없었다.

바람꽃잎보다 얇은 귀를 가진 현감은 좌의정의 꼬임에 금새 홀라당 넘어가 버렸고 대비가 있는 자경전으로 가 임금과 후궁들의 합방을 주청하기에 이르렀다.

조 귀인에게서 임금이 후사를 본다면 대비와 현감의 가문의 세력은 더욱 커질 것이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될 것이라. 그리 된다면 대비는 자신의 가문의 인물들을 뽑아 조정의 주요세력으로 세우는데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될 터였다.

" 곧 관상감에 일러 두 귀인들과의 합방일을 잡으라 할 것이니 그리 아세요."

대비가 쐐기를 박았다.

이에 무슨 말을 해도 물러설 어미가 아님을 너무도 잘 아는 윤은 차갑게 식은 찻잔을 채 비우지도 않은 채 눈의 핏줄이 억세게 설 만큼 이를 노려보았다.

***

" 왠 약식인가."

반상 위에 놓인 감주와 약식을 보며 윤이 대령상궁 신씨에게 물었다.

" 전하께서 입맛이 없으실 때 단 것을 찾으시곤 하시기에 소인이 생과방에 일러 준비하라 하였나이다."

" 입안이 꺼끌하여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는데 용케 알아보았군."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고, 섬겨온 대령상궁 신씨에 대한 윤의 신임은 무척이나 두터웠다.

그토록 믿는 이였기에 윤은 몰랐다. 대령상궁 신씨가 이 날 밤부터 매일 임금의 다과상에 어떠한 짓을 하였는지.

" 달큰한 것이 참으로 맛나는구나. 중전도 이 약식을 참 좋아하거늘. 교태전으로 가 중전과 함께 나누어 먹어야겠다. 차비하거라."

얼마 전 수수부꾸미를 베어물고 매화같은 입술로 오물거리며 먹던 서화의 모습이 생각났는지 약식도 중전과 함께 먹고 싶어진 임금이었다.

그렇게 교태전에 든 지아비와 그를 맞이한 지어미는 깊은 밤 달이 고개를 떨굴 때마다 서로를 애틋하게 위하며 부부의 을 키웠다.

***

" 스승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 마마께서 부탁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소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삼강오륜 (三綱五倫)에 대해 강론을 펼치던 서화가 대뜸 영후에게 청을 해오자 그의 얼굴엔 긴장이 맴돌았다.

" 이 오륜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부자간에는 친애(親愛)하고,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서 비롯되며, 부부간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무릇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구구절절 강조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사람으로써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그러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가능하다 생각하십니까."

서화의 말에 무언가 짐작이 가는 듯한 표정으로 영후가 말했다.

" 불가(不可)하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하오면 중전마마께서 품고 계신 뜻이 무엇이십니까?"

" 서당을 새로 짓고자 합니다."

" 서당을 말씀이십니까? 이미 도성 안팍으로 넘칠만큼 여럿입니다. 헌데 어찌..."

" 제가 짓고 싶은 서당은, 동명골의 아이들과 같이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아이들도 눈치보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삼강오륜의 작은 도리를 깨우치는 데에도 배움의 수고가 따르는 법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배움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소외되는 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차등없이 배우고 익혀야 전하께도, 조선에게도 미약하나마 훗날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 참으로 좋은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그 서당을 어디에 지으시겠습니까. 또한 서당을 짓는 비용과 서당의 훈장은 대체 어떤 이를..."

서화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제가 생각해 둔 방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웃전의 말을 경청하던 영후의 얼굴에 놀라움이 너울거리며 번져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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