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36화 (36/83)

제 36화 - 폭풍전야 [暴風前夜] (1)

" 아버님! 중전 고년이 어쩜 제 성의를 그리 무시할 수 있답니까?!!"

" 진정하시지요, 마마."

"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자신이 교태전 주인이랍시고 저를 아주 대놓고 상궁들과 나인들 앞에서 무시를 했단 말입니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최 귀인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아비인 좌의정을 불러오라며 나인들을 닥달하였다.

좌의정이 처소에 당도하자마자 교태전에서 있었던 일을 자초지총 털어놓는 최 귀인. 그러나 자신이 탕약에 어떠한 약재를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것은 쏙 빼놓은 채, 자신이 매일 정성스레 달여간 탕약을 중전이 다 마시기는 커녕 반만 마시겠노라 했다며 이는 자신과 아비인 좌의정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분을 터뜨렸다.

" 그리고 그 많은 나인들과 상궁들을 두고 저에게 기미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버님! 중전 고년의 입은 고귀한 입이고 종1품인 제 입은 조동아리인게지요. 설령 음식에 독이 들어있어도 하찮은 귀인년의 목숨은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하지만 이는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좌의정이 눈매를 번뜩 치켜뜨며 말했다.

" 어떻게 말입니까? 무슨 좋은 수가 있는 것입니까?"

" 차차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노여치 마시고 그저 마마께선 이곳에서 굿이나 보시고 떡이나 드시면 됩니다."

좌의정은 잿더미보다 더 시커먼 속내를 숨긴 채 최 귀인의 처소를 나와 바깥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교태전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 감히 내 딸을 능멸해? 주검이 되어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어주마!'

***

" 좌의정께서 이 늙은이가 있는 곳까지 어인 일이오?"

예상치 못했던 이의 방문에 대왕대비가 난을 치려던 것을 물리고 그를 맞이했다.

" 소신 좌의정, 대왕대비마마께 간청이 있어 이리 걸음하였사옵니다."

" 간청이라. 이 사람은 힘이 없소만."

고희 (古稀)를 앞둔 대왕대비는 마치 좌의정이 할 이야기를 이미 알고있는 것처럼 그에게 휘둘리지 않고 싶단 뜻을 에둘러 내비추었다.

그러나 이를 고분히 받아들일 최경주가 아니었다.

" 아닙니다. 이는 오직 대왕대비마마께서만이 해주실 수 있는 것이옵니다."

"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그것이 대체 무엇이오?"

" 전하가 후궁의 처소에 드실 수 있도록 후궁들에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좌의정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드러냈다.

" 무어라?"

당돌하다 못해 뻔뻔스럽기까지한 발언에 대왕대비의 희끗한 눈썹이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렸다.

" 아직 중전의 회임소식이 없거늘, 어찌하여 일개 후궁의 아비가 감히 내명부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한단 말이오!"

" 교태전에서 있었던 일을 혹, 알고 계십니까."

좌의정 최경주가 능청을 떨며 고개를 떨군 채 애통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 일이라니. 대체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이오?"

" 얼마 전 제 여식이 중전께 회임을 위한 탕약을 손수 달여 바쳤사온데 중전께서 대왕대비마마께서 하사하신 약재가 있어 제 여식이 달여간 탕약을 반씩만 드신다 하셨다 하옵니다."

" 헌데? 그게 대체 뭐 그리 대수란 말이오? 다른 이의 마음을 거절치 못하는 사려깊은 중전께서 그리 결단내린 것이 이 사람은 기특하다 생각하오만."

" 소인도 그 부분에 대해선 이하 동문이옵니다. 허나 그 후의 일이 문제입지요. 그 탕약의 나머지 절반은 최 귀인 마마에게 마시라 하셨다 하옵니다. 같은 전하의 여인이며 회임을 하는 것이 내명부의 도리라며 나누어 마시자 하셨단 말입니다."

" 그게 어쨌다는 거요?"

대왕대비의 표정이 사뭇 시큰둥 했다.

" 전하께서 중전마마만을 총애하시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옵니다. 후궁전엔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으시지요. 두 귀인 마마들이 입궁한 뒤로 가례날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걸음하신 적이 없으시단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중전마마께서 주상전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후궁에게 함께 회임을 하자며 탕약을 나누어 마시자 하셨으니 이는 최 귀인 마마는 물론 그 아비인 소신과 제 가문까지 우롱하시는 것이 아닐런지요."

" 중전께서 다른 마음을 품고 그리하셨다는 말을 하고싶은게요?"

대왕대비의 음성이 점차 거세졌다. 이도 그럴거니와 언제나 한결같이 한 송이의 복사꽃 같은 서화의 현숙하고 총명한 것을 잘 알고 있는 대왕대비로썬 좌의정이 내뱉는 말들이 달가울리가 없었다.

" 설사 그리하지 않으셨다해도 총애받지 못하는 후궁의 슬픔을 너그러이 살펴주시지는 못할 망정 이를 더 쓰리고 아프게 만드신 것임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왕대비마마."

" 이는 내명부의 일이니 좌의정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오."

" 소신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 아비된 자로써 홀로 적막한 처소안에서 울음을 삼키고 있는 여식을 보고있자니 억장이 무너져 이리 대왕대비마마께 찾아왔나이다. 최 귀인 마마도 대왕대비마마의 손주며느리가 아니옵니까. 부디 살펴주시옵소서."

좌의정이 머리를 조아렸다.

" 흠..."

대왕대비가 두 눈을 감고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을 위 아래로 천천히 흔들며 고민하는 듯 하자 좌의정이 이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혹 이 사실도 아십니까. 교태전의 지밀상궁이 몸이 아파 궐에서 나가 있는 동안 중궁전에 들어가는 음식들의 기미를 중전마마께서 최 귀인 마마에게 직접 하라 명하셨사옵니다. 중궁전에 중전마마를 모시는 상궁이 여럿이옵니다. 허나 이를 두고도 최 귀인 마마에게 기미를 보라하신 것은 중전마마께서 후궁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심이 아니겠습니까. 소신, 참으로 애통하여 이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사옵니다. 부디 소신과 최 귀인 마마를 가여이 여기시어 대왕대비마마께옵서..."

" 주상의 어미이신 대비께서도 이 사람의 몸이 미령할 때면 늘 제일 먼저 달려와 상궁의 유무를 떠나 아무리 말려도 제 먼저 나서 기미를 보겠다 하였소. 웃전의 기미를 아랫사람이 하는 것이 크게 어긋나는 일도 아닐 뿐더러 이전에도 중궁전의 기미를 후궁이 한 일들이 비일비재 하건만. 또한 주상의 총애가 교태전을 향하고 있음을 온 천하가 아는 바. 이를 억지로 돌린다 하여 주상이 따르겠소이까."

역시 대왕대비는 결코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다.

' 이 능구렁이 같은!!!'

말 마디마다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대왕대비의 능수능란한 대처 덕분에 최경주는 건진 것 없이 빈 손으로 대왕대비전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 흥. 이렇게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지."

이미 차선책을 마련해 둔 좌의정은 관복자락을 펄럭이며 어디론가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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