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35화 (35/83)

제 35화 - 포용과 기회 사이

" 부르셨사옵니까, 중전마마."

쓰개치마를 벗자 사각의 차액을 쓰고 의녀복장위에 견막의를 입은 앳되어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 왔는가. 자네에게 긴히 물어볼 것이 있어 불렀네. 한 상궁, 그 탕약을 가져오게."

" 예, 중전마마."

한 상궁은 최 귀인이 가져온 탕약을 내의녀 앞에 내려놓은 뒤 조심히 뒤로 물러났다.

" 이 탕약에 무슨 약재가 들어갔는지 알 수 있겠는가."

" 잠시 탕약 냄새를 맡아보아도 되겠습니까."

" 그리 하게."

내의녀가 사발을 들고 손을 부채처럼 앞 뒤로 흔들며 얼굴 가까이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 무엇인지 알겠는가."

" 여러 약재가 들어간 것으로 사료되오나 녹두와 지치의 뿌리가 들어간 약재임에는 확실하옵니다."

" 지치 뿌리의 효능이 무엇인가."

서화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 지치의 뿌리는 해독에 탁월한 약재이옵니다. 허나 이를 여인이 장기간 복용하게 될 경우엔 회임을 하지 못하게 되옵니다."

내의녀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서화와 두 상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최 귀인이 자신을 미워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심장에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고 숨이 막혔다.

" 자네..의 말은.. 불임이 된다는 것인가."

" 아주 오랜 기간 복용하게 되면 그리될 수 있사옵니다. 지치의 뿌리 같은 경우는 패국의 여인들이 침략자들에 의해 끌려갈 때 몸을 더럽히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하여도 그들의 피를 가진 아이를 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먹던 것이옵니다. 탕약에 든 약재 중에 개솔새도 있는 듯 한데 이는 확실치 않은지라... 허나 개솔새와 지치뿌리 중 하나만 사용하여도 회임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따르는 줄로 아옵니다."

내의녀에게 교태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하도록 여러번 단속을 한 끝에 내의원으로 돌려보냈다.

"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중전마마. 그 사악한 최 귀인이 중전마마께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다니요. 그래놓고 회임을 기원하는 탕약이라며 중전마마의 면전앞에 들이밀다니... 참으로 사특한 이옵니다."

한 상궁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 ..최 귀인은 내일도, 그 다음날에도 탕약을 계속 가지고 오겠지. 내 회임을 막기 위해."

그 때였다.

" 중전마마, 소인..무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박 상궁이 최 귀인이 가져온 탕약을 단숨에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 향아!!!"

박 상궁의 돌발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서화가 체면도 잊은 채 박 상궁의 이름을 부르며 이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모든 탕약을 깨끗하게 마신 뒤였다.

" 어찌하여 이리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냐! 이 안에 또 무엇이 들어있을 줄 알고!!"

서화가 박 상궁을 다그쳤다.

" 허나 이 탕약을 중전마마께서 드시지 않으시고 물리신다면 이 일의 전말을 모르는 이들이 최 귀인의 정성을 중전마마께서 물리치셨다 떠들 것이 아닙니까. 그리 된다면 교태전의 위신이 떨어지고 중전마마의 입장이 난처해지시겠지요. 그리고 최 귀인이 이리 대놓고 중전마마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위험한 탕약을 가져오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어 마신 것이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옵소서."

" 그래도 절대로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말거라. 네가 진정 나를 생각하고 사가의 어미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이 탕약으로 혹여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그런..."

" 소인의 목숨과 이 몸 모두 중전마마의 것이옵니다. 중전마마를 따라 궁으로 나서던 날, 소인은 그리 각오하였기에 언제든지 중전마마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사옵니다. 또한 소인은 궁인인지라 회임할 일도 없사온데 이깟 탕약 좀 마신다고 어찌 되겟습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마시어요."

늘 칠칠맞고 어수룩했던 향은 어느새 어엿한 상궁이 되어 서화를 위해 기꺼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비쳤다.

박 상궁의 말에 서화는 끝내 두 눈에 머금고 있던 이슬을 치맛자락으로 떨구고 말았다.

***

" 중전마마. 오늘도 탕약을 달여왔나이다."

" 그러한가."

다음 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교태전을 찾은 최 귀인을 향한 서화의 표정은 잔잔한 파도와 같았다.

" 그런데 최 귀인, 나에게 오는 모든 먹을 것을 기미하는 한 상궁이 크게 아프다 하여 당분간 사가에서 몸을 추스린 후에 다시 입궐하라 하였네. 하여, 이 사람을 그리도 많이 위해주는 최 귀인이 교태전에 들이는 음식은 물론 탕약 모두를 기미해주었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 예??"

허를 찌르는 서화의 말에 최 귀인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를 본 서화는 미세한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최 귀인이 나의 회임을 위해 이리 손수 탕약을 달여주는 그 수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미 대왕대비전에서 보내주신 약재도 회임을 위한 것이라네. 두 가지를 한꺼번에 복용하기엔 너무 과한 듯 하여 자네가 달여온 탕약은 반만 마시려 하네. 할마마마께서 보내주신 탕약을 먹지 않거나 버리는 것은 불효가 아닌가. 헌데 자네가 애써 달여온 탕약 절반을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그러니 자네가 가져온 탕약의 절반은 최 귀인이 마시는 것이 좋을 듯 하네. 자네도 전하의 여인이므로 회임을 하게 된다면 왕실에 더없이 큰 경사일 터. 안 그러한가."

최 귀인의 안색은 어느덧 한지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회임을 위해 익모초 달인 물을 자신의 처소에서 열심히 마시고 있는데 이를 막는 탕약을 함께 나누워 마시자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 소..소첩은..."

" 어찌 대답을 못하는가. 최 귀인에게도 회임은 좋은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자네의 아비가 기다리는 소식일텐데?"

최 귀인이 임금의 승은을 단 한 번도 입지 못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비인 좌의정이 최 귀인의 회임을 목빠지게 바라고 있다는 것은 서화 역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 ...소, 송구하오나 중전마마. 갑자기 소첩 진땀이 나고 현기증이 나는 것이 오늘은 이만 처소로 물러가고자 하옵니다. 몸이 회복되는대로 중전마마의 기미를 맡을 것이오니 그..그 때까지 부디..소첩의 무례를..용서하여 주시옵소서."

" 자네 입궁한 뒤로 몸이 자주 아픈 듯 하네. 어제 조 귀인도 아픈 기색이 역력하던데 자네도 그러한가 보군. 물러가시게."

항상 몸이 미령하다며 걸핏하면 교태전으로 문안인사 드는 것을 회피하고 어쩌다 걸음하여도 일각을 넘기지 못하고 늘 먼저 처소로 돌아가 아픈 몸을 눕히겠다던 최 귀인의 말을 겨냥한 말이었다.

' 오늘은 그냥 보내주겠네.'

서화가 속으로 생각했다.

최 귀인이 투기에 눈이 멀어 '잘못'이 아닌 '실수'를 한 것이라 생각하고 최 귀인에게 기회를 주고자 함이었다.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둔치가 아님을 부디 최 귀인이 알기를 바랬다. 부디 더 이상의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기를.

" 중전마마, 최 귀인이 또 탕약을 가지고 올까요?"

박 상궁이 조심스레 서화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 아마 안 올걸세."

자신이 탕약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음을 눈치 빠른 최 귀인이라면 알아챘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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