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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궁궐의 봄-34화 (34/83)

제 34화 - 연모

한 해 전.

그 날도 오늘과 같이 청명한 하늘빛에 구름 한 점 없는 말간 날이었다.

입궁하기 전 사가에 있을 때, 시종을 거느리고 글을 쓰기 위한 종이를 구입하기 위해 지전으로 향하던 날이었다.

그러다 미처 근처에서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사내 둘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미리 피하지 못했던 인경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히이이이잉-!!

급히 정거하느라 고삐를 있는 힘껏 휘어잡는 사내들로 인해 말들이 소리를 내며 멈추려 하였으나 이미 너무 뒤늦은 때였다.

" 인경아씨!!"

시종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이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어디선가 사내가 나타나 인경의 팔을 재빨이 잡아채었고 덕분에 가까스로 큰 화를 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 조심하시오. 이 거리엔 파발마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니. 아녀자의 몸으로 크게 다칠 수 있는 곳이니 되도록이면 이 거리로 드나들지 마시오."

" 고맙습니다. 헌데 귀공의 존함이...어? "

인경이 사내의 이름을 물어보려 하였을 때는 이미 인기척도 없이 눈깜짝할 새에 모습을 감춘 뒤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순식간에 사라진 사내.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인상깊었던 사내의 늠름한 용모와 여섯 척은 거뜬히 넘어보이는 훤칠한 자태.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자신을 구해주었던 거리로 몇 번이나 나가 기다렸지만 그 뒤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 그 사내가...내금위장 영감이었다니..."

그토록 보고싶었던 그 사내를 오늘에서야 다시 만나다니.

그것도 이 궁 안에서...

그 분은 나의 지아비를 호위하는 무사로...

나는... 그 분이 모시는 분의 여인으로...

운명이란 참으로 기구하고 모질기도 하구나.

***

" 전하. 이제 그만 편전에 드실 시각이옵니다."

임 상선의 말에 윤이 눈을 살짝 흘겨보더니 이내 중전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세하고 온화한 웃음을 머금었다.

" 알았다. 중전, 이따가 다시 오리다. 중전께서 수수부꾸미를 사가에서부터 즐겨들었다기에 과인이 생과방에 이를 준비하라 일러두었으니 나중에 함께 드십시다."

윤의 말에 서화가 분홍 꽃잎처럼 물든 얼굴로 살짝 끄덕이며 예, 전하.라며 대답하였다. 서화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윤은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편전으로 향했다. 떠나기 아쉬운 듯 서화를 다시 한 번 그윽하게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은 채.

"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많이 연모하시는 것 같사옵니다."

박 상궁이 붉은 기가 채 가시지 않은 서화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 전하께선 어진 성군이시네. 그렇기에 이처럼 나를 비롯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성은을 베풀어주시는 것일세."

" 하지만 제가 처음 전하를 뵈었을 때는 어찌나 무서운 표정을 짓고 계시던지 오금이 저려 혼쭐이 났습니다. 온 몸에 가시가 콕콕 박히신 듯한 모습으로 저 멀리서 오시는 모습만 보아도 소인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는걸요."

박 상궁의 호들갑에 서화가 구름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두 눈을 초승달처럼 길게 휘었다.

" 자네, 내가 그토록 입에 빗장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단속하라 하였건만! 중전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인의 부덕함으로 인해..."

" 아닐세, 한 상궁. 박 상궁의 이 활발함 덕분에 교태전이 한결 밝아지지 않았는가. 사가에 있을 때부터 박 상궁의 이러한 모습 덕분에 내 지루할 틈이 없었네."

서화가 한 상궁과 박 상궁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 박 상궁, 창문을 좀 열어젖혀주겠는가. 시원한 바람을 좀 쐬고 싶으니."

" 예, 중전마마."

활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햇살의 기다란 빛줄기가 교태전 서온돌 바닥까지 거침없이 스며들었다. 따스한 볕 냄새가 마음을 더욱 싱그럽게 만들어주는 듯 했다.

" 헌데 중전마마...이것은 어찌할까요?"

박 상궁이 최 귀인이 가지고 왔던 탕약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 이리 가까이 가지고 오게."

" 예, 중전마마."

약이 담긴 사발을 들어 다시 한 번 코끝으로 향을 맡아보는 서화.

" 최 귀인이 무엇으로 이 탕약을 달였는지 박 상궁과 한 상궁, 자네들도 기억을 하는가."

" 예, 소인이 듣기로는 익모초라 들었사옵니다. 여인의 자궁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회임을 도와주는데 으뜸가는 약초로 널리 알려져 있는지라 소인도 잘 알고 있는 약재이옵니다."

한 상궁이 답하였다.

" 소인도 그리 들었사옵니다."

박 상궁도 같은 대답을 하였다.

" 어찌하여 그런 하문을 하시는 겁니까?"

" .. 내 기우이길 바라지만 탕약의 향이 익모초가 아닌 것 같아 그러네."

서화가 얕게 탄식하며 말했다.

" 예? 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박 상궁이 놀란 얼굴로 탕약을 쳐다보았다.

" 글쎄...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할마마마께서 보내주시는 탕약과는 사뭇 다른 향이 나는구나."

제철에 나는 풀초와 꽃가지를 꺾어 말려 차로 만들고 그 효능에 따라 약재로 만들어 아비인 부원군에게 가져다 드리곤 하던 서화였다. 어디 그 뿐인가. 좋은 풀뿌리들을 선별하여 음식에 제일 많이 들어가는 된장의 주재료인 메주와 함께 띄워 약된장으로 만들거나 술로 빚기도 하였다.

그런 그녀의 코끝을 스치는 최 귀인의 탕약은 익모초를 달인 것이라 하기엔 진한 시큼한 내가 났다.

" 허면 최 귀인이 중전마마께 다른 탕약을 바친 것입니까? 어찌 그런 일이..당장 최 귀인을 잡아 물고를 내셔야 합니다."

" 최 귀인을 잡아오겠나이다. 최 귀인에게 이 탕약을 직접 먹이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박 상궁과 한 상궁이 아연실색하여 최 귀인을 잡아와야 한다 하였다.

" ...박 상궁, 자네는 나를 진맥하는 교태전 담당의 내의녀를 불러오게. 내 직접 물어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것이네.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이를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 소인, 지금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데려와야 한다."

" 예, 중전마마."

박 상궁은 치맛자락이 펄럭일만큼 '상궁'의 체면도 잃은 채 빠르고 큰 걸음으로 내국으로 가 내의녀를 교태전으로 데려왔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쓰개치마까지 씌워 데려왔는데 어찌나 빨리 데려왔던지 박 상궁이 교태전을 나선지 이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돌아왔다.

" 중전마마, 소인 박 상궁이옵니다."

" 들라."

장지문이 열리고 머리위까지 치마를 뒤집어 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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