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33화 (33/83)

제 33화 - 행복에는 시샘이 깃든다.

한 상궁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서화의 명대로 탕약을 세 마마들 앞에 내려놓았다.

" 이리 제 마음을 알아주시니 감흡할 따름이옵니다, 중전마마."

최 귀인이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서화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자 서화는 조금 전보다 다소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 최 귀인이 이리 이 사람을 위해주니, 고맙네."

" 어서 이 탕약을 드시고 부디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생산하소서. 소첩이 가장 잘 영글은 익모초를 골라 달여온 것입니다."

최 귀인의 익모초를 달여왔다는 말에 서화의 눈빛이 잠시 경직되었다.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뜬 서화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 자네 지금.."

" 주상전하 납시오!"

서화가 최 귀인에게 뭐라 말하려던 찰나 윤의 행차를 알리는 내관의 우렁찬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장지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붉은 비단의 곤복(袞服)과 익선관을 걸친 윤의 모습이 드러났다.

" 전하."

서화가 말갛고 해사한 웃음으로 윤을 맞이했다. 그러자 윤 또한 유한 눈빛으로 서화와 눈을 맞추었다.

" 중전."

그러나 이내 방 안에 후궁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선 윤이 최 귀인과 조 귀인을 응시하며 말했다.

" 두 귀인들까지 교태전에 있을 줄이야. 과인이 때를 잘못 맞추어 온 듯 하구려."

" 아니옵니다,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리 앉으시지요."

윤이 상석에 앉고 서화와 최 귀인, 조 귀인이 그 뒤를 이어 조신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이 시각에 어인 일이십니까? 근자에는 정무가 많으시어 신시는 지난 후에 오시기에 오늘도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 임 상선이 끝도 없이 상소문을 과인의 면전 앞에 들이미는 바람에 중전의 얼굴을 볼 시간이 석수라 들기 전의 잠깐 뿐이니 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리 걸음하였소."

복녕이를 하사 받은 뒤로 강아지를 보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교태전에 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이도 모자라 부쩍 윤이 서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솜털처럼 부드러워졌다.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지아비의 다정함에 이것이 꿈은 아닐까 할 만큼 가슴 설레여 하는 나날들의 지속이었다.

" 그리고..."

" ...?"

" 중전께서 과인에게 진 빚을 받으러 왔소."

" 예?"

" 과인에게 국화차 한 잔 내어주시기로 하지 않았소? 헌데 중전께선 도통 그럴 생각이 조금도 아니 보이시기에 과인이 직접 받으러 왔소."

윤의 음성에 서화를 장난스레 질책하는 듯하면서도 농을 던지는 어투가 섞여나왔다.

" 송구하옵니다, 전하. 신첩이 당장에.."

" 되었소. 오늘은 귀인들께서도 함께 계시니 차는 이따가 밤에 따로 조용히 받겠소. 헌데 이 탕약들은 대체 무엇이오?"

윤이 방 구석 한 귀퉁이에 놓여있는 탕약들을 가리키며 서화에게 물었다.

" 최 귀인이 신첩과 조 귀인의 기력을 북돋아주는 탕약을 직접 달여왔나이다. 최 귀인의 정성에 신첩, 감동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 최 귀인이? 참, 장한 일을 하는 군. 왕실의 여인들이 투기를 멀리하고 이리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소. 최 귀인, 중전을 이리 잘 모시니 과인이 무척 흡족하도다."

윤의 칭찬에 최 귀인이 날카로운 발톱을 철저히 감춘 채 그저 수줍은 새색시 마냥 윤의 앞에서 발그레해진 뺨을 내보이며 말했다.

" 그리 생각해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최 귀인의 속은 부글부글 끓는 홧홧한 기운으로 머리까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 헌데..조 귀인은 어찌하여 그리 안색이 좋지 않은겐가?"

" 아, 아니옵니다, 전하. 소첩 괜찮사옵니다."

여전히 윤이 무서운 조 귀인은 그저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채 답하였다.

" 얼굴이 창백한 것이 병색이 도는 듯 하니 처소로 돌아가 쉬도록 하는 게 낫겠소. 최 귀인도 조 귀인과 함께 그만 물러가도록 하라."

" 허면 탕약은..."

처소로 돌아가라는 윤의 말에 최 귀인이 조심스레 탕약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자 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 중전께서 나중에 드실터이니 물러가도록 하라."

" 예, 전하."

" 예, 전하."

조 귀인과 최 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금께 예를 갖추고 뒤로 걸어나왔다. 중전과 임금이 자신들을 물리치고 교태전 안에서 깨를 볶을 것이란 생각에 부아가 치밀은 최 귀인. 이 모든 게 아픈 조 귀인 때문에 간만에 전하의 용안을 느긋하게 뵐 여유도 없이 쫓겨난 것이라며 조 귀인의 어깨를 확 밀치고 쿵쿵 거리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최 귀인의 심술에 순간 조 귀인의 몸이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 귀인 마마!"

조 귀인을 모시는 상궁과 나인들이 이를 알아차리고 조 귀인을 붙잡으려 하였으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 ..헉..!"

바닥에 머리를 찧는 쿵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들리지 않았다. 조심히 눈을 뜨자 내금위장인 시운이 시야에 들어왔다.

" 괜찮으십니까."

" ..아...예.."

시운이 조 귀인의 어깨를 감싸안아 지탱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시운의 품에 안기게 된 조 귀인은 자신들을 보고 있는 상궁들과 나인들의 눈들을 의식하고선 그의 팔을 뿌리쳐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 고..고맙습니다, 내금위장 영감."

인사를 건네는 조 귀인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있었다.

" 몸이 별로 편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아마 열이 있으신 듯 한데... 연을 준비하라 이를 테니 그것을 타고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내금위들에게 마마를 모시라 하겠습니다."

가마를 타고 가라는 시운의 말에 조 귀인이 이를 극구 사양하였다.

" 아닙니다, 잠시 어지러웠던 것 뿐이나 지금은 괜찮습니다."

" 그러다 또 다시 쓰러지시기라도 하시면 윗전 마마들께 누를 끼치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타고 가시지요."

" ...허면...그리 하겠습니다."

윗어른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불찰이요, 염려를 끼치는 불효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란 내금위장의 말에 조 귀인은 그제서야 그리하겠다 답하였다.

가마가 교태전 앞에 당도하고 그 안에 올라 탄 조 귀인. 자신의 어깨를 잡아채던 시운의 크고 묵직한 힘이 어찌나 강하던지 아직도 어깨가 얼얼하였다.

' 그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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