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화 - 회임 기원
" 자네와 내 여식과의 혼사를 주선하려 하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술잔을 들이키려던 영후의 손이 좌의정의 말에 멈칫했다.
" 저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영감."
" 허나 자네의 혼기가 이미 꽉 차다 못해 한참 지나질 않았는가. 나에게 참한 둘째 여식이 있네. 내 여식이지만 참으로 선하고 순종적이라 자네에게도 잘 어울리는 짝이라 생각하네만."
" 송구하나 좌의정 영감의 뜻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는 조선을 떠나 유랑하며 다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처자식이 생기게 되면 그들에게도 못할 짓일 것입니다."
" 자네 아버님께서 자네의 혼처를 은밀히 물색하고 있다 들었네만?"
좌의정이 게슴츠레 눈을 길게 뜨며 영후를 쳐다보았다.
" 제가 아버님께 불효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혼인에 발이 묶이는 것보다 하고픈 것, 보고픈 것이 더 많습니다."
" 허나..."
" 송구합니다, 좌의정 영감. 몸이 좋질 않아 오늘은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오늘 대감께서 하셨던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좌의정의 말도 끝까지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와 벗어두었던 흑혜를 신었다.
" 후우.."
무슨 일인가 했더니.
좌의정의 여식과 혼인이라니.
그의 시커먼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듯 했다.
' 중전으로 간택될 줄 알았던 여식이 귀인이 되자 좌의정을 따르던 무리들의 화합에 균열이 일고 있다 들었다. 최 귀인이 주상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도 아마 좌의정일 것이다.'
걸음을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좌의정이 있는 방 안에서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 술잔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것이 들렸다.
' 자존심과 명예에 상처를 입은 그가 다시 힘을 키우기 위해선 궁 안팍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임금의 국구인 아버님 만한 이가 없다 이건가.'
영후는 오늘 밤의 있었던 일을 모두 떨쳐내버릴 참이었다. 좌의정의 욕심을 채워주는 수단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벌써 가십니까."
좌의정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던 기생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영후에게 말을 걸었다.
" 그렇소."
" 문 밖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기생을 따라 영후는 묵묵히 앞서가는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러던 중 멀리 한켠에서 한 무리의 기생들이 널리 열린 장지문 너머 모여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 중 유일하게 댕기머리를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 낯이 익다.'
날이 어두워 여인의 얼굴이 온전히 눈 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여인을 본 순간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 이보시오. 저 여인은 어째서 홀로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 것이오?"
영후가 앞서가던 기생에게 물었다. 그러자.
" 오늘 밤 화초를 올리게 될 아이입니다. 하여 다른 기생들이 단장을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 화초라 하면..."
" 예. 화초값을 치룬 사내와 첫날밤을 보내는 것입니다."
유월관 대문에 가까워질수록 조금 전 보았던 댕기머리의 여인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 대체 어디서 보았을까.'
해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 머리를 원망했다.
***
" 자네들이 어쩐 일인가."
서화를 찾아온 두 여인. 하지만 그 여인들 중 한 여인을 바라보는 서화의 낯빛이 그리 밝진 않았다.
"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혹여 중전마마의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어 탕약을 지어왔나이다."
서화의 면전 앞으로 조심스레 탕약이 든 탕기를 들이미는 여인. 이는 다름아닌 최 귀인이었다.
" 이미 할마마마께서 내의원을 통해 몸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혈이 잘 돌도록 하는 약재를 보내주셨다네."
서화가 자신의 옆에 놓여있는 약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 소첩 또한 중전마마의 강녕을 염원하며 이리 손수 달여왔나이다. 중전마마를 비롯하여 저와 조 귀인 모두 주상전하를 모시는 궁궐의 여인들 아니옵니까. 전하를 성심을 다해 모시려면 우리 여인들이 무탈해야 할 터, 그리하여 중전마마께는 원자생산을 위한 좋은 약재들을 함께 넣어 달인 탕약을, 조 귀인에게는 어혈을 풀어주는 탕약을 달여왔나이다. 또한 함께 즐기고자 사가에서 제 어미가 보내준 약과도 함께 가져왔사오니 부디 제 마음을 물리치지 마소서."
조수라를 마치자 마자 조 귀인의 처소에 들러 함께 교태전으로 가자 조른 최 귀인이었다. 조 귀인은 서화와 진정한 벗의 관계이므로 교태전에 자주 발걸음을 하는 터라 최 귀인과 함께 굳이 걸음하고 싶진 않았으나 내명부의 수장을 모시는 자들로써 웃전에 더욱 자주 찾아가 얼굴을 비추며 안부를 묻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며 최 귀인이 다그치자 어쩔 수 없이 함께 교태전으로 온 터였다.
" ..."
서화가 최 귀인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자 최 귀인이 최대한 선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 대왕대비전에서도 대비전에서도 중전마마의 용종잉태를 기원한다 들었사옵니다. 중전마마께서도 하루빨리 회임하시어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굳건히 하셔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회임...용종...
최 귀인의 입에서 웃전의 회임기원 이야기가 나오자 서화의 양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놓은 두 주먹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 소첩도 제 몫의 탕약을 가지고 왔나이다. 비록 맛은 쓰다 하나 세 여인이함께 마시면 그 괴로움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여 말입니다."
최 귀인을 마주할 때면 늘 자신을 쳐다보는 적대감 어린 시선과 노기가 서려있는 얼굴에 마음이 불편하여 최대한 최 귀인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던 서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얼굴의 기색은 온데간데 없이 생글거리며 서화를 마주하자 최 귀인을 경계하던 서화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렸다.
" 부디 제 정성을 받아주시옵소서. 소첩은 중전마마께서 회임하실 때까지 매일 제 손으로 탕약을 달여 올릴 것이옵니다. 중전마마께서 전하의 후사를 이을 원자아기씨를 잉태하시는 것이 소첩의 제일 크나큰 소원이옵니다."
눈가에 촉촉한 눈물방울까지 그렁거리며 말하자 여지껏 최 귀인을 피하던 자신이 부끄럽고 최 귀인에게 내심 미안해졌다.
' 내가 너무 최 귀인을 멀리하였구나. 나를 이토록 위해주는 줄도 모르고...'
" 한 상궁. 최 귀인이 달여온 탕약을 들이게."
" 예?"
서화의 말에 한 상궁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한 상궁 역시 최 귀인의 악한 시선을 여러번 목격했던 터라 탕약을 들이라는 상전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 최 귀인이 그리 정성을 들여 달였다는데 내 어찌 물리칠 수 있겠는가. 두 귀인들에게도 탕약을 들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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