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화 - 각골난망 [刻骨難忘]
" 전하께오서 친히 생것방에 이르시어 다과상을 준비하라 하셨사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태전에 갖다드리라 하시어..."
" 전하께서?"
제조상궁의 말에 서화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 예. 이리 가져오게."
제조상궁의 눈짓에 뒤에 다과상을 들고 있던 나인 둘이 조심스레 서화와 부원군 앞에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 이것은..."
" 그 동안 전하께서 너무 무심하시어 중전마마와 부원군 대감께서 서로를 그리워하셨으니 부디 이 차 한 잔으로 그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회포를 푸시길 바란다 전하셨사옵니다."
윤의 어명으로 제조상궁이 내온 것은 먹음직스런 약과와 구절초 꽃차였다.
' 전하께서 내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시고...'
윤의 깊은 배려에 서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중전마마. 소신에게 중전마마를 찾아뵈라고 말씀하신 것도 주상전하이십니다."
부원군이 말했다.
" 전하께서요?"
" 예. 전하께서 근자에 들어 중전마마께서 많이 적적해하신 듯 하니 교태전에 들어 중전마마의 외로움을 덜어드리라 하시면서 소신의 교태전 출입을 윤허해주셨사옵니다."
' 이 아비는 이제 근심을 덜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이리 중전마마께 마음을 써주시니...소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감격스러움에 서화의 목이 메였다.
" 정말 전하께옵서..."
"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종종 교태전에 들어 중전마마의 말벗을 해드리며 사가에 있을 때처럼 부녀간의 사이를 돈독히 하라 하셨습니다."
"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입었습니다."
진심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이토록 헤아려주시다니.
각골난망(刻骨難忘)이었다.
***
" 중전께서 이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로..."
서책을 보고 있던 윤은 서화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 제법 놀란 눈치였다.
" 전하께...올릴 말씀이 있기에..."
서화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이 들었다.
" 허면 내일 낮에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을...어찌 여기까지 걸음하신게요?"
" ...마음이 벅차서요, 전하.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이 황송한 마음을 도저히 가눌 길이 없어 전하를 뵈러 온 것입니다. 오늘 신첩과 아비에게 하사해주신 다과상과 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한 전하의 마음...신첩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 허면 과인에게도 차 한 잔 대접해주시겠소?"
" 예?"
서화의 말에 윤이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 국구께서 말하길 중전의 차 우리는 솜씨가 일품이라 하던데, 과인은 아직 그 맛을 보지 못하였소."
" 아..."
" 과인에게도 중전께서 직접 우린 차를 맛볼 수 있게 해주겠소?"
" 물론이옵니다, 전하. 성심을 다하여 그리하겠사옵니다."
" 기대하고 있겠소."
강녕전을 나온 서화의 얼굴엔 달뜬 기색이 역력했다. 윤이 자신에게 먼저 이리 살가이 다가와준 적은 처음이었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지아비의 눈빛, 그의 눈동자에 담기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하고도 괜시리 가슴이 벅찼다.
***
" 중전마마, 그간 평안하셨사옵니까."
" 예, 스승님."
영후가 간만에 교태전에 들었다. 동명골에 다녀온 뒤로 대왕대비 강씨의 탄신연 준비로 인해 한동안 분주하였던 터라 도통 검술 연습과 글공부를 하지 못했다.
"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스승님."
" 말씀하시지요."
" 얼마 전, 조선에서 파사국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단을 꾸려 온 듯 한데 어찌하여 그 먼 곳에서 조선땅까지 온 것입니까? 파사국 물건이라면 명국의 상단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통상적인 것인데 말입니다."
"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가의 여인들의 사치가 심해지면서 이들이 선호하는 파사국의 물건을 들여오는 명국 상단에서 값을 열다섯배나 올렸다 하옵니다. 이를 안 파사국에서 더 좋은 자국의 물품을 직접 들여와 그보다 더 낮은 가격에 팔고 있사옵니다. 한 마디로 명국과 파사국 간의 경쟁이 붙은 것이지요."
" 어찌 그런 일이..."
" 파사국에서는 명국에 공급하는 물품의 종과 단위를 삭감하였고 자국의 새로운 것들을 조선으로 들여와 많은 득을 보고 있다 합니다."
" 제가 만난 파사국 사람은 조선말에 능한 이였습니다. 파사국에서 온 사람들 모두가 그러한 것입니까?"
"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파사국에서 온 사람들은 말을 익히고 배우기에 있어 굉장히 남다르다 들었사옵니다. 한 계절이면 한 나라의 말을 말하고, 듣고, 쓰고, 읽기까지 할 줄 안다 하니 참으로 놀라운 재능이 아닐런지요."
사가에 나갔을 때 만났던 파사국 사내가 생각이 났다.
" 본보기가 되어야 할 사대부의 여인들이 그토록 사치를 즐기는 줄은 몰랐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헐떡이고 있는 이 와중에...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그 방도를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 소신도 궁리를 해 보겠습니다."
교태전을 나선 영후는 퇴궐하려 걸음하던 중 좌의정과 마주쳤다.
" 좌의정 영감,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 대사성 아니신가. 오랜만일세. 사라국에서 얼마 전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네. 지금은 중전마마의 글선생 노릇을 하고 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인겐가?"
" 예, 좌의정 영감."
"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조만간 유월관에서 봄세. 내 따로 기별하겠네."
"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좌의정이 자신에게 할 말이라.
도통 교류가 없는 이였기에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따로 만남을 갖길 원하는 좌의정의 저의가 쉬이 짐작 되지 않았다.
' 헌데...좌의정 영감의 옆에 있는 이는 관상감 교수가 아닌가. 어찌 관상감 교수가 함께...'
영후와 이야기를 나눌 때 좌의정 옆에 서 있던 사내. 제법 얼굴이 낯익어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그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관상감은 천문(天文)을 비롯하여 지리(地理), 역수(曆數), 점산(占算), 측후(測候), 각루(刻漏) 등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 좌의정 영감과 관상감 교수라...'
다소 개운치 못한 표정으로 영후는 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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