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29화 (29/83)

제 29화 - 따스한 볕 안에서 움트는 감정

" 대산(大繖)를 치우거라. 볕이 따뜻하여 직접 쐬고 싶구나."

윤과 서화의 머리 위에서 내관이 받치고 있던 일산(日傘)인 적색의 대산을 윤이 치우라 명하자 곧 따사로운 온기가 윤과 서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향원정에 가까워질수록 구절초의 꽃내가 짙하게 풍겨왔다.

" 중전의 말씀이 맞소. 구절초는 모양새만 어여쁜 것이 아니라 향도 짙어 스치기만 해도 향기에 취할 것 같소."

윤이 향원정 주변을 빼곡히 매운 구절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 예, 전하. 구절초를 꺾어 꽃 잎을 말린 다음 따뜻한 물에 우려내어 차로 마시면 그 맛과 향 또한 좋사옵니다."

" 중전께선 어찌하여 그리 잘 아시오?"

윤이 묻자 서화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 신첩의 아비가 구절초 꽃차를 좋아하여 사가에 있을 때 가을이 되면 신첩이 직접 구절초를 꺾어 말렸나이다."

" ..그러하였군."

" 예, 매년 이 맘 때면 바짝 마른 구절초 꽃잎과 따뜻한 물이 담긴 다도상을 들고 사랑채로 건너가 아비와 함께 차를 마시곤 하였지요."

" 장인께서 적적하시겠군. 곁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여식이 이곳에 와있으니."

윤의 말에 서화는 아무말 없이 그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서화를 바라보던 윤은 생각에 잠겼다.

중전의 아비 윤성한은 과묵한 자였다. 중신들이 그토록 탐내는 최고의 위치인 국구자리에 있음에도 늘 그림자처럼 있기를 자처하는 이. 필요치 않다면 먼저 나서는 일은 결코 없었다. 자신이 먼저 찾지 않는 한 귀인들의 아비인 좌의정과 현감처럼 먼저 알현하러 오는 일도 무척 드물었다.

들은 바로는 여지껏 중전을 만나러 교태전에 발걸음 한 적도 없었다. 본인의 행동이, 사소한 것이 여식의 발목을 붙잡는 일이 될까봐, 웃전들의 눈밖에 나게 될까봐, 행여라도 교태전을 보는 눈들에게 책 잡히게 될까봐 그런 것이겠지.

얼마나 보고싶을까.

부인도 일찍 저세상으로 보내고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여식마저 첩첩산중

같은 궐로 보냈으니.

드러내진 못해도 서로를 많이 그리워할 것이란 생각에 윤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윤과 서화가 함께 향원정으로 산보를 나갔던 일은 대왕대비전과 대비전을 비롯, 귀인들의 처소와 궁궐 구석 곳곳으로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

" 소단아! 당장 신 상궁을 데려와라! 당장 말이다!!!"

소문을 들은 귀인은 경대 위의 패물들을 패대기치며 악을 썼다.

이에 식겁한 소단이는 대령상궁 신씨를 최 귀인 처소로 데려왔다.

" 어서오시게."

패악질을 부리던 최 귀인은 아무일 업었다는 듯 신 상궁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 소단이 넌 뭘 하고 있는게야? 어서 다과상을 내오지 않고!"

" 예! 마마님!"

항시 곁에서 임금을 모시는 대령 상궁. 최 귀인은 주상전하의 대령상궁인 신씨를 구슬려 자신의 편으로 만들 심산이었다.

" 어찌하여 귀인마마께서 소인을 찾으신 것이옵니까."

" 나도 중전마마와 같이 전하의 여인이 아닌가. 신 상궁도 전하를 곁에서 늘 모시는 전하의 사람인데 내 궐에 들어와 이리 애쓰는 자네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 한 번 하지 못한 것 같아 불렀네. 중전마마도 조 귀인도 자네의 수고를 몰라주는 듯 하여 나라도 나서야 할 것 같아 말일세. 그동안 다들 자네에게 너무 소원하였던 듯 하여 그저 차나 한 잔 하자 불렀네."

최 귀인은 재빨리 곁에 두었던 비단꾸러미를 신 상궁에게 내밀었다.

" 자, 받으시게."

" 송구하나 소인은 받을 수 없사옵니다."

신 상궁은 최 귀인이 내민 비단꾸러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 듣자하니 자네의 노모가 많이 편찮다 들었네. 몸의 원기를 북돋아주는 약재이니 받아주게."

" 최 귀인 마마. 이리 마음 써주셔서 감흡할 따름이오나 소인, 귀인마마가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사옵니다."

" 왜, 내가 자네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여 거절하는 겐가? 그렇다면 염려치 말게. 전하를 뫼시는 같은 처지로써 전하를 걱정하여 이러는 것이니. 아무리 내색하지 않는다 하나 어찌 궁 밖의 사가에 있는 노모 걱정을 안 할 수 있겠는가. 전하를 곁에서 모시는 자네가 그리 근심에 잠겨 있으면 전하께 누를 끼치는게 되는걸세. 하여, 전하를 위하여 그러는 것이니 자네가 진정으로 전하를 생각하는 충심이 있다면 받아주게."

최 귀인은 그럴듯한 이유를 대가며 신 상궁을 흔들었다.

한사코 받기를 거부하던 신 상궁은 최 귀인이 주상전하를 진정으로 생각하라 말하자 결국엔 이를 받고 말았다.

" ...그럼 이번만 그리하겠사옵니다."

" 알겠네, 내 마음을 알아주니 고마우이."

일단 첫 단추꿰기는 성공이라며 최 귀인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

" 지금 무어라 했느냐, 그 말이 참말인게야?"

" 예, 중전마마. 부원군 대감께서 곧 교태전으로 오신다는 기별이 왔사옵니다."

한 상궁이 뜻밖의 소식을 전하자 서화의 얼굴엔 기쁨이 넘쳐 흘렀다.

" 아버님이 오신다 하니 단장을 해야겠다. 박 상궁, 얼마 전 새로 지은 당의를 내오게."

사가에서 돌아온 후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비였다. 상의원에서 지어 올린 연분홍 스란치마와 백색당의를 입고 부원군을 맞이하였다.

차마 자리에 앉아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 교태전 밖으로 나가 저 멀리 부원군이 오는 것을 보고선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 아버님!!!"

" 중전마마!"

사가에서 보았던 아비의 모습보다 더욱 눈에띄게 노쇠해진 모습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서화를 바라보는 부원군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 중전마마, 어찌 버선발로..."

" 그동안 너무너무 보고싶었습니다, 아버님..너무...너무나요..."

두 손을 꼬옥 맞붙잡고 서온돌로 들어온 두 사람은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 아버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못 본 새에 많이 야위신 것 같습니다."

이전과 달리 약소해보이는 아비의 어깨를 보고선 서화가 글썽이며 말했다.

" 아닙니다. 날이 추워져 관복을 새로 지었는데 이전보다 크게 지어 그리 보이는 것일 것입니다."

" 중전마마, 대전의 제조상궁이 중전마마 뵙기를 청하옵니다."

부녀의 애틋한 재회가운데 박 상궁이 장지문 너머로 제조상궁의 입실을 알렸다.

" 제조상궁이? 들라하여라."

서화의 말에 문이 열리고 제조상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 제조상궁이 어찌하여 교태전까지 발걸음을 한 것인가?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서화가 묻자 제조상궁이 운을 뗐다.

" 전하께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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