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28화 (28/83)

제 28화 - 삼생연분 [三生緣分]

" 최 귀인 마마, 좌의정 영감 들었사옵니다."

" 아버님께서? 어서 드시라 해라!"

" 아버님! 무에 이리 오래 걸리셨습니까. 통 기별도 없으시고 혹여 잊으신 건 아닌지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 귀한 것을 구해오느라 시일이 좀 걸렸습니다."

간만에 처소에 든 좌의정을 보고 반색을 하며 최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비인 좌의정을 맞이했다.

" 해서, 구해오셨습니까?"

다과상이 나오기가 무섭게 나인들을 멀리 물린 최 귀인이 좌의정에게 속삭이듯 말하며 물었다.

" 예. 이 아비만 믿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좌의정이 최 귀인 앞에 놓여있는 서안 위에 두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 이것이 무엇입니까?"

" 적색 주머니엔 백단향유가 든 병이 들어있고 남색 주머니엔 약재가 들어있습니다. 한 번 열어보시지요."

아비의 말에 최 귀인이 잔뜩 오므리고 있는 주머니의 입구를 느슨히 풀러 안을 들여다 보았다.

" 백단향유는 어디에 쓰는 것입니까, 아버님?"

" 이 향유는 사내를 끌어당기는 향을 품고 있다 합니다. 귀인 마마께서 전하를 모시는 밤, 이 향유를 몸에 바르시면 전하께선 몸이 뜨거운 불같이 동하시어 마마를 취하실 것입니다."

" 참말입니까?"

" 예. 천축국과 파사국의 귀족 아녀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라 합니다. 향각에 백단나무조각을 담는 것보다 직접 바르시면 마마의 체온으로 인해 발향이 더욱 잘 된다 하니 꼭 몸에 바르십시오."

천축국(인도)의 '찬다나', 즉 백단은 천축국에서 최고의 신성한 상품(上品)으로 여겨지며 최음제로 쓰이는 것으로 백단나무로 염주와 불상을 만들기도 하고 이것에서 짜낸 기름과 가루를 이용하여 여성들이 몸에 발라 사내를 유혹하는데 쓰였다. 백단나무의 줄기에서 추출한 향은 으뜸중에서도 으뜸이라, 그 값어치 또한 엄청났지만 이것을 사려는 손길은 끊이질 않아 늘 품귀현상이 일었다.

백단이 생산되는 천축국에서도 귀한 것인지라 다른 나라에서는 이것을 구하기 위해 본래 가격의 몇 십배, 몇 백배를 치루고서라도 사겠노라 하는 이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음에도 좌의정은 여식을 위해 어마어마한 큰 값을 치루고 구해온 터였다.

좌의정의 말에 최 귀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 허면 이 남색 주머니에 든 약재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 열어보십시오."

남색 주머니 안엔 삼지구엽초와 대추, 파사국의 육계나무 수피(계피)가 들어있었다.

" 삼지구엽초와 대추는 뭉친 어혈을 풀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약재와 함께 달이고 육계나무 수피는 가루를 내어 전하의 주다소반상의 강정 위에 뿌려 내가시고, 야다소반상의 타락죽이나 약식에 함께 섞어 내가십시오."

" 허면, 전하께 얼마동안 올려야 합니까?"

" 양의 기운이 몸 안에서 원활히 돌기 위해선 나흘에서 엿새가 걸린다 하니 엿대 동안 꾸준히 올리시지요. 소신은 관상감 교수와 함께 길일을 택하여 조정신료들과 함께 귀인 마마와 주상전하의 합방을 주청드려 전하께서 이것들을 드신지 꼭 이레가 되는 날 마마의 전각에 드시도록 할 것입니다."

" 정말 그리 하면 되는 것이지요?"

최 귀인이 두 주머니를 손에 꼭 쥔 채 재차 좌의정에게 물었다.

" 예, 귀인 마마. 허니 이 아비가 관상감과 논하여 길일을 택하고 나면 연통을 넣을 것이오니 그에 맞춰 전하께 올리시면 됩니다."

" 아버님만 믿겠습니다."

두 부녀의 음침한 미소가 전각안을 가득 매웠다.

***

" 소단아, 내의원에 가서 육모초(익모초) 좀 받아 달여오거라."

" 예? 탕약을요?"

" 내가 원자를 생산하려면 단전을 따뜻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전하를 뫼실 때 전하의 씨를 잘 품으려면 나부터 채비를 해야 할 터, 그리하여 내의원에 다녀오라는 것이다."

" 송구합니다. 미천한 소인이 귀인 마마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사옵니다. 소인, 얼른 내의원에 다녀오겠사옵니다."

최 귀인은 상궁보다 더 가까이 자신의 곁에 두고 긴밀한 심부름을 시키는 나인인 소단이를 불러 익모초를 달여오라 일렀다.

" 아, 그리고 네 아비에게 은밀히 일러 개솔새와 지치뿌리 좀 더 구해와야겠다."

개솔새와 지치뿌리.

이 두 가지는 여인으로써의 기능을 막아 회임을 막는 약초로 최 귀인은 궁궐에서 윤의 승은을 입은 여인들은 모조리 이것으로 만든 탕약을 먹였다.

근자에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윤이 여인을 들이는 일이 없었다. 예전에는 나흘이 멀다 하고 여인을 들이더니 요즘에는 교태전을 찾는 발걸음이 잦아졌다 하였다.

' 이는 필시 중전, 여우같은 고년이 전하를 홀린게야.'

서화가 최 귀인의 눈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서화만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 중전의 자리에 앉아있었을 터. 약이 올랐다.

' 두고 보라지. 내 전하의 보위를 이을 원자를 생산하여 반드시 세자로 삼고 교태전의 자리를 되찾을 것이니.'

***

" 복녕이가 처음보다 제법 묵직해진 것 같소."

" 그렇습니까."

윤의 말에 서화가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말아접으며 웃었다.

" 헌데 전하. 어젯밤에도 교태전으로 걸음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아직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았나이다."

복녕이를 보겠노라며 교태전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는 윤.

서화와 윤의 어색함을 복녕이가 상쇄시켜주었다.  '복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삽사리 새끼가 서화의 손에 맡겨진지 벌써 보름이 되었다. 그 동안 강아지는 무럭무럭 자라 바닥에 미끄러지던 네 다리엔 제법 힘이 들어가고 무거운 머리로 인해 항상 쳐져있던 고개도 이전보다 더 빳빳하게 들고 다녔다.

서화를 졸졸 따라다니는 복녕이의 애교(愛嬌)부리는 모습에 미소를 감출 줄 몰랐고 윤은 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흐뭇해 하는 것이 요즘의 낙이었다.

' 희한하군. 예전엔 여인을 안지 않으면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거늘.'

요즘에는 천월각을 찾아가는 횟수도 부쩍 줄어들었다. 침수들 때도 다음 날 복녕이가 가지고 놀 만한 것을 들고서 교태전으로 가 복녕이의 재롱을 보며 기뻐하는 서화를 볼 생각 뿐이었다.

" 볕이 무척 따뜻하오. 과인과 함께 후원에 잠시 나가 거닐지 않겠소?"

" 전하와 함께요?"

뜻밖의 물음에 서화가 깜짝 놀란 듯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이 교태전에 쉴새없이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불과 보름밖에 되지 않은 데다 그마저도 복녕이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자신을 여인으로 볼 수 없다 하며 곁을 내주지 않는 지아비가 생전 처음으로 함께 산책을 가자 하니 서화로썬 놀랄 수 밖에 없었다.

" 그렇소. 왜, 과인이 함께 걷자 하니 이상한 것이오?"

" 아니옵니다, 전하. 하오면 향원정으로 가시겠습니까. 떡비가 내린 뒤인지라 건들바람이 한초롬한데다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어여쁘옵니다."

" 그럼 그리 가십시다."

윤과 서화가 교태전을 나섰다. 두 마마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나인들과 상궁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서화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수줍은 듯 얼굴이 익은 홍도처럼 발그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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