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화 - 수복강녕[壽福康寧]
매듭 사이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강아지였다.
어미개의 젖을 먹고 자라 포동포동 살이 오른 귀엽게 생긴 강아지를 보고선 서화가 해사하게 웃으며 매듭을 풀어 자유롭게 해주었다.
" 전하. 이것은 강아지가 아니옵니까?"
" 삽사리(삽살개)요."
" 참으로 어여쁩니다. 그런데 어찌 이 어린 강아지가 궁궐에 홀로 남겨져 있었단 말입니까?"
" 그건 과인도 모르오."
끼잉..끼잉..
어미와 형제들을 찾는 듯 울음소리를 내는 삽사리 새끼를 서화가 조심스레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가까이 들여다 보니 털 속에 비단끈이 강아지의 목에 둘러매어져 있었다.
그제서야 서화도 알아차리었다. 우연이 주은 것이 아니라 임금이 애지중지하시는 강아지를 자신에게 선물로 주시려 일부러 친히 발걸음 하시었다는 것을. 주상전하의 삽사리 사랑은 궁의 무수리도 알 정도였으니. 깊은 구중궁궐 속에 새끼 강아지가 홀로 덩그라니 남겨져 있었을리가 없었다.
윤과 서화가 가례를 올리던 날, 숙부인 봉성대군이 혼례를 감축한다며 삽사리 한 쌍을 가져와 윤에게 진상하였다. 귀신과 액을 쫓는다는 삽사리는 신라시대 때부터 왕실과 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왔는데 봉성대군도 임금과 중전 두 마마의 안위가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암수 한쌍을 데려온 것이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윤은 금새 삽사리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삽사리를 보러 갈 정도였다. 그러다 삽사리 암컷이 새끼를 낳았고 그 중 제일 튼실하고 어여쁜 한 마리를 심사숙고하여 중전의 선물로 가지고 온 것이었다.
임금의 체통을 지키셔야 한다며 임 상선이 삽사리에게로 향하는 임금의 발길을 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리 애지중지 하는 삽사리의 새끼를 중전의 선물로 가져왔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 전하, 이리 귀한 선물을 신첩에게 주시다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강아지의 이름은 중전께서 직접 지어주시오."
" 전하께서 제게 주시는 것이니 이름도 전하께서 지어주십시오."
서화가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맞든 찻잔에서 우러나온 국화향이 방 안의 공기를 부드럽게 데웠다.
" 그럼...복녕(福寧)이라 부르는 것이 어떻겠소?"
윤이 귀히 여기는 삽사리 한 쌍의 이름은 다름 아닌 복되게 오래살고 건강하고 편안하란 뜻으로 '수복(壽福)'과 '강녕(康寧). 이들의 새끼이니 어미와 아비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복되게 안녕하란 의미의 '복녕'.
그렇게 해서 삽사리 새끼의 이름은 '복녕'이 되었다.
" 참으로 좋은 이름입니다."
처음이었다. 서화가 이렇게 하염없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윤에게 보여준 것이.
서화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윤의 심장은 또 다시 뜨겁게 들끓기 시작했다.
" 중전마마께서 오래토록 무탈하시고 강녕하시길 바라시는 주상전하의 깊은 어심으로 액운을 떨쳐주는 삽사리를 몸소 준비하신 것이옵니다."
윤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임 상선이 곁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 서화에게 아뢰었다.
" 임 상선. 어찌하여 웃전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냐."
민망해진 윤은 괜히 임 상선에게 퉁박을 주는 시늉을 했다.
" 참으로 감읍하옵니다, 전하."
" 흠..흠.. 잘 키우시오. 이 놈은 잦은 병치레도 없고 주인에 대한 충성심도 남다르다오. 좀 더 크면 중전을 잘 따를 것이오."
윤이 '복녕'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온기를 느낀 복녕이가 윤의 곤룡포 위로 파고들었다. 위엄있는 전하가 앙증맞은 강아지 새끼를 품고 있는 모습에 서화를 비롯한 상궁들과 임 상선은 입가에 미소가 연신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
***
깊은 밤. 복면을 쓴 사내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어느 한 저택 안에 스며들었다.
" 오랜만이군."
"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단주 어른."
복면을 쓴 사내가 얼굴을 덮고 있던 검은 천을 내려 얼굴을 드러낸 뒤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 무탈할리가 있겠는가. 좌의정의 여식이 교태전의 주인이 될 것이라 믿고 그간 힘을 보태왔거늘 다른 이가 그 자리를 꿰차고 앉게 되었으니 말일세. 나에게는 염려치 말라고 하더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닭 쫓던 개가 지붕쳐다보는 격일세."
사내를 바라보는 '단주 어른'이라는 이가 심기불편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역정을 내었다.
" 그것에 대해선 염려치 말라십니다.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조금 멀리 돌아가게 되었으나 단주 어른과 함께 맺은 뜻엔 변함이 없다는 것이 그 분의 말씀입니다."
" 허면, 무슨 방도라도 있는 것인가?"
" 예. 허나 단주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 말해보시게. 일단 들어나 봄세."
단주의 귀에 대고 은밀히 무언가를 은밀히 전달하는 사내.
"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나 대체 무엇에 쓰려 하는 것인가? 그깟 것으로 교태전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겠느냔 말일세."
" 그 분께서 방도가 있으시다 하시니 단주 어른께선 그분의 말씀을 믿고 구해주십시오."
" 알겠네. 다만 그 전에 한가지만 확실히 함세. 전에 나에게 그분이 나에게 약조하신 것은 유효한 것이겠지?"
" 예. 일이 성사되면 반드시 그리하시겠다 하셨습니다."
" 그럼...자네와 그분만 믿겠네. 내일 이 시각, 다시 오시게. 내 그것을 준비해 놓을터이니."
" 예. 고맙습니다, 단주 어른."
다음 날 밤, 단주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은 복면의 사내는 또 다시 어두움에 의지하여 어디론가 향했다.
" 들어오게."
소리를 죽인 복면의 사내의 인기척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방 안의 사내가 문 너머로 말했다.
복면의 사내가 들어서자 정자관을 쓰고 심의를 입은 채 꼿꼿하게 앉아있는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 대감 어른."
" 구해왔는가."
" 예."
복면의 사내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 이것이 그것이란 말이지."
" 예. 적색주머니에 든 것은 몸에 바르시면 되옵고 남색 주머니에 든 것은 드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단주에게서 들은대로 복면의 사내가 고하였다.
" 수고하였다. 자. 필요하면 또 부르겠네. 그만 물러가보게."
묵직한 소리를 내는 주머니를 '대감 어른'이라는 자가 앞으로 던져주자 복면의 사내가 냉큼 그것을 집어들며 자취를 감췄다.
" 이제 곧...교태전의 주인을 바꿀 수 있을 것이야. 으하하!"
생각만 해도 좋은지 '대감 어른'이라 불리는 사내가 방 안에서 홀로 음침하게 웃으며 두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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