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25화 (25/83)

제 25화 - 진정한 부부의 연

" 이리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참으로 기쁘구나."

" 중전마마. 헌데 어찌 이 야심한 시각에 사내복장까지 하시고 오신 것입니까? 혹 저희가 중전마마를 곤경에 빠뜨리게 한 것입니까?"

강연의 걱정어린 물음에 서화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아니다. 그것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 처지가 예전만큼 자유롭지 못한 까닭에 너희들을 보러 오기에 이 차림이 거동하기 더 편하여 그런 것이야. 그리고 먹을 것을 좀 가져왔으니 아끼지 말고 배불리 먹도록 해. 당분간은 부족함 없이 먹을 수 있을 것이야. 내 앞으로도 계속 들러 먹고 입는 걱정은 하지 않게 해줄 터이니."

오랜만에 찾은 동명골엔 새로 보이는 어린 얼굴들이 여럿 있었다. 제 아비가 아이들을 위해 음식과 옷을 보낸다 하여도 국사 일로 바쁜 아비에게는 녹록지 않은 일일 터. 한창 먹을 아이들의 얼굴 곳곳에 버짐이 피어있자 서화의 마음이 아팠다.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이 은혜를 어찌..."

" 바깥의 음식들은 모두 주상전하께서 하사하신 것이야. 너희들 모두가 전하의 백성들이다. 그런 너희들이 배고픔에 굶주리지 않도록 돌보고자 하시는 주상전하의 자애로우신 성은 덕분이니 부디 심신을 강건히 하여 훗날 이 나라에, 주상전하께 보탬이 되어주어야 한다.."

모든 것을 윤의 성은으로 돌리는 서화였다. 그 모습에 영후는 또 한 번 속으로 깊이 감탄하였다.

" 예, 그리 하겠습니다. 꼭 그럴 것입니다, 중전마마."

" 글 공부도 게을리 하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할 것이야. 아는 것이 있어야 세상을 바라보는 견문도 넓어지는 법이니 말이다. 강연이 네가 여기서 제일 나이가 많으니 고되더라도 아이들을 책임지고 가르쳐야 한다. 너희들도 강연 누이의 말을 잘 따라야 할 것이야."

" 명심하겠사옵니다, 중전마마."

방 안의 아이들이 모두 합을 하여 다부지게 말하자 서화가 만족스러운 듯 기쁜 웃음소리를 냈다.

***

" 소신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 그게 무엇입니까?"

궐로 돌아가는 길. 어두운 밤길에 수줍은 듯 고개를 빼꼼 내민 달빛을 동무삼아 가던 중 영후가 서화에게 물었다.

" 강연이란 아이 말입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입니까?"

" 예. 그곳엔 모두가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가지고 있지요. 강연이는 풍족치는 않았으나 양반가의 여식으로 일찍이 글을 깨우친 영민한 아이입니다. 허나, 두 해 전 역병이 창궐하여 부모와 형제, 친족들까지 모조리 잃고 이리저리 전전하다 동명골에 오게 되었지요."

이제서야 아까 강연을 쳐다보던 서화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서려있던 연유를 알 것 같은 서후였다.

"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그곳에 있는 아이들 모두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건춘문에 다다른 두 사람. 그곳엔 아니나 다를까 초조한 표정의 박 상궁이 서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 마마!"

" 쉿! 목소리를 낮추게. 누가 들으면 어찌하려고 그리 큰 목청으로 부르는 게야."

" 이크! 송구하옵니다. 축시까지 돌아오신다 하셔놓고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셔서 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습니다."

박 상궁이 얼른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리며 말했다.

" 이리 무사히 돌아왔지 않은가. 스승님, 예까지 동행해주시어 고맙습니다. 부디 돌아가시는 길 살펴가십시오."

" 예, 중전마마. 그럼 소신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서화가 예를 갖추어 말하자 영후도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답하고 발길을 돌렸다.

" 정말 참으로 잘나신 분이십니다."

박 상궁이 영후의 뒷모습을 보며 넋을 잃은 채 말하자 서화가 말했다.

" 박 상궁의 눈에 스승님이 그리 보이는겐가."

" 예. 참으로 잘생기셨습니다."

스스럼없이 말하는 박 상궁의 말에 서화는 그저 옆에서 자그맣게 웃고 말았다.

***

며칠 후.

" 전하. 시각이 다 되었습니다."

" 알았다."

오늘은 교태전에서 중전과 합방을 하는 날이었다. 서화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걸음이 느릿느릿 더디게만 느껴졌다.

드르륵-

나인들이 문을 열어 길을 터주자 윤이 서화가 있는 동온돌 안으로 들어섰다.

" ...오셨습니까, 전하..."

" ......"

오랜만이었다. 호롱불에 의지하여 깊은 밤, 서로를 마주하게 된 것은.

아침마다 웃전에 문후를 드리기 위해 잠시 함께하는 것은 비록 매일있는 일이었어도 그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왕대비전으로 걸어갈 뿐,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일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서화와 윤은 차마 서로의 시선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아무말 없이 바라보았다.

" 흠흠..대령상궁이 오늘 밤은 교태전에 들 차례라 일러주어 이리 걸음하였소."

" 예."

괜히 걸음한 이유까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윤과 다르게 너무도 차분한 모습의 서화. 어여머리를 풀러내리고 금박 자수가 놓인 당의가 아닌 고결해 보이는 새하얀 속적삼을 입은 서화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 볼수록 윤의 심장이 점차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례 때만 해도 어린 소녀 같던 중전에게서 어느새 만개한 여인의 향기가 나는군.'

선녀같은 모습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는 서화의 갸녀린 어깨를 꽉 안아주고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윤의 발목을 붙잡는 떠난 이의 그림자로 인해 주먹을 꽉 쥐며 마음을 억눌렀다.

" 그만 침수 드시지요. 불을 끄겠나이다."

" 그리하시오."

두 사람은 금침 위에 나란히 누웠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손을 움직여도 상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윤의 귓가에 서화의 얕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좋게 간질이는 서화의 숨결에 윤은 호흡을 고르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다.

" !"

누운 자리 어딘가가 불편하였는지 서화가 몸을 살짝 뒤척이며 움직이던 중 그만 서화의 손길이 윤의 손을 스치고 말았다.

불에 데인 듯 순식간에 달아오른 윤의 손. 심장의 두근거림이 손 끝자락까지 퐁퐁거리며 퍼져나갔다.

" 이 모든 것은 다 중전이 자초한 것이오."

이성을 잃은 윤이 서화와 얼굴이 닿을만치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고선 순식간에 입술을 포개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서화의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술기운이 아닌 맨 정신으로 오롯이 맞댄 서화의 털쌘구름같은 입술의 감촉은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보드라웠다.

" 하아..하아..."

멎었던 숨이 차오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쁘게 몰아내쉬는 서화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붉게 달아오른 뜨거운 열기가 서화의 얼굴 곳곳에 열꽃처럼 피어났다.

" 우리는 종옥지연(種玉之緣, 혼인의 인연)을 맺은 부부가 아니오, 중전. 이전엔 과인이 중전을 안지 못한다며 여지껏 거짓부부의 연을 맺어왔지만 이젠 진정 지아비와 지어미의 연을 맺어볼까 하오. 중전은 어떠하시오?"

또다시 순식간에 서화의 입술을 탐하는 윤. 방 안은 점차 뒤섞인 달뜬 숨소리로 에워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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