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화 - 내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거늘..
" 어찌하여 이제서야 과인을 만나러 온 것인가. 아니지, 과인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중궁전에 들렀다 퇴청하는 길에 겸사겸사 과인에게 들른 것이라 하는 것이 옳겠군."
윤의 농담섞인 비꼬임에 영후가 억울하단 듯이 말했다.
" 그렇잖아도 사라국에서 돌아온 날 밤, 비록 시각은 늦었으나 전하를 뵙고 싶은 마음에 한달음에 입궐을 하였었습니다. 헌데 전하께서..."
" 과인이 뭘 하였기에?"
윤이 말끝을 올리며 물었다.
" 다른 여인을 침소에 들이시어..."
" 어흠! 그만해라. 그만하면 알아들었다. 이왕 온 김에 술이나 하자꾸나. 시운이와 함께 셋이서 술잔을 기울인지도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영후의 말에 헛기침을 하며 술상을 들이라 명하는 윤이었다. 그런 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찬바람을 쐬며 울고있던 여인이 생각나는 영후였다.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은 주안상을 들여오는 나인들의 인기척에 곧 산산히 부서졌다. 오랜만에 친우들끼리 조우하여 술잔을 기울이게 된 세 사람. 윤이 세손시절이었을 때부터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그의 곁을 지켜온 시운과 영후였다.
세자시절에는 이렇게 셋이서 함께 잠행도 나가고, 맛있게 빚은 술도 나누어 마시고, 사냥도 나갔었다. 윤이 보위에 오른 후에도 이들의 우정은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윤이 자신의 정인을 떠나보내기 전까진 적어도...그랬었는데...
" 전하. 아직도 그분을 놓지 못하신 겁니까."
영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놓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설이가 나이고 내가 곧 설이기 때문에...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취중진담. 오랜만에 죽마고우들과 기울이는 술잔에 윤의 속마음이 조금씩 두꺼운 허물을 깨부수며 드러나기 시작했다.
" 허나...지금의 중전마마께서도 총명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전하께서 어서 후사를 생산하시어 종묘사직을 굳건히 하셔야..."
" 그리 고리타분한 말은 네가 아니어도 조종신료들에게, 어마마마, 할마마마로부터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고 있으니 그만 하여라. 이리 다 같이 모여 기분좋은 날에 꼭 찬물을 끼얹어야 겠느냐. 부디 너까지 그런 말 하지 말아다오. 내 이미 충분히 괴로우니 말이다."
" ...죽은 사람은 다시 되돌아 올 수 없습니다. 산 사람이라도 죽은 이 몫까지 더욱 행복하게 살아야지요. 이건 전하의 벗으로써 드리는 말씀입니다."
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 나도 내 마음이 내 뜻대로 따라주질 않는 걸 어쩌란 것이냐. 나도 잊고 싶다. 사는 것이 괴로워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란 말이다. 왕이란 이름에 짖눌려 내 감정 하나 어찌하지 못하면서 군왕의 백성들을 두루두루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불성설이지 않느냐."
" ......"
"......"
영후와 시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임금의 곁에 늘 있다 생각하였다. 그 누구보다 전하와 가까이 있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차마 알아차릴 수 없었던 윤의 깊이 감춰져있던 속마음에 두 사람의 마음속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 설을 대신해 무수히 많은 여인들을 안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갈증과 그리움은 사라지질 않아. 도리어 사무쳐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다. 헌데...말이다. 이상하게 중전은...안을 수가 없어."
" 예?...그게 무슨..."
" 다른 여인들을 취하듯 중전을 안으면 될 텐데...그 사람을 안을 자신이 없다."
' 그 사람을 생각하며 중전을 안는다는 것이...그리하면 중전이...상처받을 것이 아닌가...그로인해 그 여인이 아파할 것을 보기가 두렵네.'
윤이 속말을 술과 함께 삼켰다.
하지만 윤은 정작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서화를 다른 여인과 같이 취할 수 없는지. 그것이 왜 그토록 두려운 일인지를.
시운과 영후는 이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짐작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주군의 마음에도 봄이 어슴푸레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
" 이것은 중전마마께서 좀 더 수월히 검을 드실 수 있도록 중량과 길이를 가볍고 짧게 손보아 온 것 입니다."
영후가 조심스레 환도 한자루를 서화에게 건네며 말했다.
" 제게 너무...작은 것 같습니다."
무서워하긴 커녕 도리어 검이 작아 보인다니. 서화의 말에 영후가 할 말을 잃은 듯 우두커니 서화를 쳐다보았다.
" 이 길이가 중전마마께서 사용하시기에 적당합니다. 이보다 더 길면 중전마마께서 검을 휘두르시는 것이 아니라 검에 중전마마께서 휘둘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검을 쥐는 것이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허나 검술을 익히시다 보면 차차 검을 쥐고 휘두르시기 편해지실 겁니다."
" ..알겠습니다, 스승님."
검복으로 갈아입은 서화의 모습은 흡사 미색이 짙은 어린 사내처럼 보였다. 투박한 검복을 걸치고 있어도 박꽃처럼 하얀 피부와 그윽한 눈동자는 숨겨지지 않았다.
" 허면, 시작하지요."
서화의 당찬 모습에 영후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검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한 집중력을 보이며 영후를 따라 검을 익히는 서화의 모습에 영후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검술 훈련에 집중했다.
***
" 누구십니까?"
마당을 쓰느라 여념없던 조서방이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며 물었다.
대문 앞엔 조선인이 아닌 것으로 짐작되는 사내가 조선의 사대부 복장을 한 채 서 있었다.
" 내 잠시 찾는 이가 있어 들렀소만."
" 누구를 찾으시는뎁쇼?"
" 향...이라는 규수가 이곳에 아직 머물고 있소?"
" 규수라굽쇼? 아이고 지나가던 누렁이가 배꼽빠지게 웃겄네. 으허헛, 향은 중전마마께서 혼례를 올리시기 전, 여기 좌찬성 대감마님댁 아씨이셨던 시절에 아씨를 모시던 몸종이구만유."
향을 규수라 칭하며 찾는 낯선 이의 말에 조서방이 박장대소하며 답했다.
" 그 처자...를 좀 불러주시겠는가."
" 여기에 없습니다요. 중전마마께서 사가로 나오셨다 궁으로 되돌아가실적에 함께 궁으로 갔구먼유. 그것도 상궁이 되어서 말입니다요."
조서방의 말에 설렘을 잃어버린 선비의 두 눈동자가 애처로이 흔들렸다.
" 궁인이 되었으니 이제 향은 궁에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요..아마 죽어서나 나올랑가..."
피부빛이 짙은 사내의 풀죽은 모습을 보고선 딱해보였는지 조서방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터벅터벅..
'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갈등한 끝에 어렵게 발걸음을 하였건만..궁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정녕 영영 향의 얼굴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찰나의 물 흐르듯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 생각하였다. 그리 치부하며 지나치려 하였다. 그럼에도 잊혀지지가 않아 큰 맘을 먹고 향을 찾으러 간 것이었다.
" 향..."
까만 눈동자가 허탈함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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