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화 - 은밀한 비밀
" 중전마마. 성균관 대사성 민영후 들었사옵니다."
" 안으로 들라하게."
발을 내려 얼굴을 가린 서화가 영후를 맞이했다. 영후가 서화에게 큰 절을 올렸다. 난생 처음으로 발걸음한 교태전에선 은은하고 부드러운 꽃내음이 공기를 향긋하게 만들었다.
" 소인, 앞으로 중전마마를 뫼실 대사성 민영후라 하옵니다."
" 제 스승님이시니 저도 앞으로 존대를 하겠습니다."
" 그건 아니될 말씀입니다. 어찌 마마께서 신하에게 존대를 하실 수가 있으시단 말입니까."
서화의 말에 영후가 크게 펄쩍뛰며 말했다.
" 하지만 그러는 편이 제겐 더 편한 일입니다."
" ..."
" 제 뜻에 따라주시지요."
" 마마의 뜻이 정녕 그리하시다면...그리 하겠습니다."
중궁전에 든지 일각(一刻)도 채 되지 않았건만. 서화의 고집에 영후는 쩔쩔맸다. 허나 높은 분의 뜻을 어찌 꺾을 수 있으랴. 내키진 않았지만 결국 그리하겠다고 하였다.
" 이런식으로 또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서화의 청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민들레의 하얀 솜털처럼 영후의 귓가를 타고 흘러 그의 가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 소신도...중전마마의 글스승이 되어 이리 교태전에 발을 디디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영후의 아비인 국사 민영익이 사랑채로 그를 불러 중전마마의 글스승 노릇을 하라 하였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헌데 이상하게도 교태전에 드나들며 이참에 마음잡고 장가 들 준비나 하라는 아비의 꾸지람을 듣는 내내 그 소리는 귓등만을 스치고 지나갈 뿐, 속에선 정작 밤의 어둠에 기대어 자신의 슬픔을 쏟아내고 있던 중전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 그리고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은...서로 잊는 걸로 하지요."
" 중전마마께서 그리하고 싶으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서화가 말하는 '지난 밤'. 그것이 무엇인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터. 마치 은밀한 비밀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 ...고맙습니다, 스승님."
" 헌데...중전마마께선 어찌하여 글공부를 더 배우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조선 최고의 여인이신 중전마마의 인자한 성품과 학식 또한 으뜸이시라 들었습니다만..."
영후가 들은 중전마마는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여인이었다. 중전간택 때 간택질문에 대한 서화의 답은 듣는 이 마다 무릎을 치며 감탄을 할 정도였으니. 또한 왕실의 웃어른을 성심을 다해 공경하고 궁궐의 나인들을 일일이 챙길만큼 성품 또한 햇살같은 분이라.
시침든 여인들을 궁궐 밖으로 내치셨던 전하와는 달리 그 여인들을 거두어 특별 상궁 교지를 내리고 궁 안의 거처를 마련해줄 만큼 마음이 참으로 어질고 고운 분이라며 궁안팍으로 존경을 받는 중전마마였다.
"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어찌 배우는 것에 한계가 있겠습니까. 자리에 앉아 서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세상의 물정과 이치에 능한 스승님께 배우고 싶습니다. 스승님께선 여러 나라를 가보시고 그들의 문화, 정치, 문물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직접 보고 겪으셨다지요. 그런 스승님을 통해 배운 것으로 미약하나마 주상전하를 도와 이 나라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싶습니다."
' 참으로 어지신 분이 아닌가.'
절로 감탄이 나왔다.
" 저도 곁에서 성심을 다해 중전마마의 글공부를 돕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헌데...스승님."
서화가 다소곳한 목소리로 영후를 불렀다.
" 예."
" 혹...검을 다루실 줄 아십니까?"
서화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단어에 영후는 순간 자신이 혹여 잘못 들은 것인가 하였다.
" 검이요? 예예...소신 비록 문관이긴 하나 기본 검술 정도는 익혔습니다. 헌데...어찌하여 그런 위험한 것에 대해 여쭈시는 겁니까?"
" 저에게...검술도 함께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 예에???"
저도 모르게 영후가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 가능하다면...아무도 모르게 말입니다."
" 중전마마!"
아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연약한 중전마마께서 검술을 배우시다 혹여 귀하신 옥체에 탈이라도 나심 어쩌시려고. 그건 그렇다 쳐도 아무도 모르게라니. 대체 왜...
" 전하께도 비밀로 하고 말입니까?"
" 예. 제가 스승님께 검술을 배우는 것은...중궁전 한 상궁과 박 상궁에게만 알릴 생각입니다."
" 어찌 그런 위험한 것을 배우고자 하십니까?"
" 교태전에 앉아 제가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근이 들 때 내탕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허나 궐밖엔 흉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원인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궁궐에 들어오기 이전엔 이따금씩 동명골에라도 들러 갈곳없는 어린 아이들을 도왔으나 이젠 이리 궁에 묶인 신세가 되어버려 그 아이들이 어찌 지내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곧 매서운 겨울이 올텐데 그렇게 되면 그 아이들이 어찌 견뎌낼지...해서, 궁밖에 나가 백성들을 직접 돕고 보살피고 싶습니다. 전하의 성은이 미처 닿지 않는 곳들로 말입니다. 허나 혹시 모르니 제 몸 하나 정도는...스스로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아... 헌데 전하께선 윤허해 주실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 안됩니다. 이는 절대 아니될 말씀입니다."
영후가 절대 안된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이리 간곡히 부탁드려도 아니되겠습니까."
다과상을 옆으로 치우고 상체를 숙이며 고개를 숙이는 서화의 음영이 발 너머로 보이자 영후도 덩달아 재빨리 몸을 굽혀 머리를 조아렸다.
" 중전마마!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그리 하셨다 혹여라도 마마께서 곤경에 빠지시거나 자리를 비우신 사이 전하께서 교태전에 발걸음을 하시면 그 감당을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 전하께선...달포에 하루만 교태전에 발걸음하십니다. 그러니 그 날만 피하면 괜찮을 것입니다. 또한 저도 가끔씩, 아주 가끔씩만 나갈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 정녕...꼭 그리 하셔야 하겠습니까."
영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비가 중전마마의 글스승이 되어라 하였을 때 거절을 했어야 했다. 아니, 신하가 전하의 어명을 거역할 순 없는 노릇이니 전하께서 자신을 찾지 못하시도록 사라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다시 짐을 꾸려 조선을 떠났어야 했다.
" 그럼...제 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 중전마마께서 그리 간청을 하시는데 소인이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만 몸을 일으키시옵소서!"
그제서야 서화가 몸을 일으켰다. 얼굴은 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서화가 빙긋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발을 잘못 들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영후였으나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꼼짝없이 중전마마의 청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학문과 더불어 검술이라. 어찌 여인의 몸으로 그리 험한 것을 배울 생각을...보통내기의 여인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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