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20화 (20/83)

제 20화 - 바람이 부는 곳엔 눈물이 흐르고...

" 정말 전하께선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어찌 중전마마께 그런 하명을 하실 수 있으시단 말입니까?"

향이 분한 표정으로 한 상궁에게 하소연을 하자 이를 잠자코 듣고 있던 한 상궁이 말했다.

" 박 상궁. 웃전들께서 하시는 일들은 우리같은 아랫것들이 감히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네. 자네도 이제 궁인이 되었으니 숨 쉬는 코를 제외한 모든 것을 닫아걸고 입단속을 해야 할 것이야. 순식간에 사람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니 말이네. 이건 자네도 익히 들어 알테지."

한 상궁의 엄포에 향이 겁에 질린 듯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꼭 막으며 잠잠해지자 한 상궁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향. 박 상궁은 순하고 맑은 아이다. 그러나 다소 입놀림이 가벼운듯 하여 궁인으로써의 몸가짐을 익히게 하기 위해 일부러 무섭게 말하였다.

' 하지만...궁은 정말 그런 곳이 아닌가. 세치 혀 간수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간 눈 깜짝할 새에 목이 날아가고 시신 조차 묘비명 하나 없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질 수 있는 곳이 바로 궁이거늘...'

고개를 돌려 바라본 서온돌의 문에선 등불의 빛이 은은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근정전에서 돌아온 뒤로 아무 말도 없이 수라도 거르고 침묵만을 유지하는 서화가, 자신의 상전이 감히 가엽고 안타까웠다.

" 한 상궁. 게 밖에 있는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한 상궁이 재빨리 예- 대답을 하곤 서온돌로 들어섰다.

" 부르셨사옵니까, 중전마마."

" 자네는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으니 궁안의 귀가 더 밝을 터. 그러니 자네가 주상전하를 뫼실 아이들의 후보를 추려 나에게 데려오게. 그 중에서 내가 직접 골라 연생전으로 보낼 것이야."

서화의 두 눈동자는 차분하다 못해 일렁임 하나 없이 고요했다.

" ...하오나, 중전마마..."

" 괜찮네. 교태전에 들어앉아 하는 것 하나 없이 그저 자리보존만 하는 허수아비같은 중전은 되기 싫네. 전하의 어심이 편안하실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도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전하의 곁에서 시침들 아이는 참하고 행동거지가 조신해야 하니 이를 염두하여 아이들을 골라주게."

" ...예. 중전마마."

지금 한 상궁 자신보다 속이 더 썩어 문드러지는 것은 서화일 것이다. 궁궐에서 그 누구보다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웃전이기 때문에 아랫사람들 앞에서 여린 모습을 감추고 근엄함을 유지하려는 서화의 노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한 상궁은 알았다는 대답 이외에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서화는 한 상궁이 데려온 나인들 중 심사숙고하여 한 아이를 골라 목욕재계를 시키고 한복과 머리를 곱게 땋아 연생전으로 보내었다.

시각이 흐를수록, 구름에 가리워져 있던 반달이 아름아름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에 앉아 공자의 <논어>를 읽고 있는 서화. 그러나 다음 책장을 쥐고 있는 손은 좀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탁.

도저히 안되겠는지 읽고 있던 서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바람을 쐬면 갑갑한 가슴이 좀 트일까 하여 향원정으로 향했다.

쏴아아-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시원한 소리를 냈다. 멍울투성이인 서화의 가슴을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다. 휘날리는 바람 속에서 제법 가을 냄새가 났다.

" 잠시 나 혼자 따로 걷고 싶으니 여기들 있게."

서화가 자신의 뒤를 잇따르던 궁녀들에게 넌지시 말하고는 홀로 걸음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었다.

궁녀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때 쯤이 되어서야 느릿하게 걷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섰다.

" 흐흑...흑..."

이 정도의 거리라면 울어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겠지.

바람 소리가 나의 울음을 삼켜줄테니.

' 아버님. 이것이 정녕 전하를 모시는 여인이 겪는 슬픔이란 말입니까.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심장을 바늘로 쉴새없이 쑤시는 듯한 이 고통을...어마마께서도...할마마마께서도...그렇게 몇십년을...순응하시고 받아들이셨단 말입니까...'

거센 바람에 눈물 방울이 사방으로 힘없이 흩어졌다.

" 아직 날이 덥다 하나 밤공기는 춥습니다. 고뿔에 걸리시어 옥체 상하시기 전에 어서 교태전으로 드시지요."

아무도 없다 생각하여 무방비 상태로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서화의 앞에 낯선 사내가 말을 걸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덕에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미처 가릴 새도 없이 당황한 서화가 급히 몸을 돌린 채 등을 보이며 말했다.

" 무엄하다. 감히 중전인 나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 소인도 그냥 지나치려 하였으나 밤눈이 어두운지라 우는 소리를 듣고 귀신인가 기괴한 바람소리인가 하여 확인해보려 가까이 발걸음을 하였다 겨우 중전마마인 것을 알았습니다. 마마를 뫼시는 상궁들과 나인들도 주변에 없는 듯 하여 소인, 감히 무례한 줄 알면서도 걱정이 되어 말씀을 올렸나이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서화가 어깨를 펴고 차분해진 모습으로 몸을 돌려 사내와 마주했다. 밤이라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임금인 윤의 성산(나이)과 비슷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걸치고 있는 관복은 홍색에 흉배에는 쌍학이라. 품계가 높은 문관인 듯 했다.

" 무례하구나.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응당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것이 마땅하거늘."

" 송구하옵니다. 소인은 성균관 대사성 민영후라 하옵니다."

" 그대의 이름은 내 잘 알았느니. 이만 물러가라."

사람의 인품은 뒷모습에서 알 수 있다 하였던가.

서화의 명에 따라 자취를 감추는 민영후의 뒷모습과 발걸음에서 올곧은 기개와 기품이 느껴졌다.

'민영후...어딘가 많이 들어본 낯익은 이름인데...'

울고 있던 사실조차 어느새 잊어버리고 민영후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으며 낯설지 않은 그의 존재를 기억 속 어딘가에서 찾아내려 했다.

" 아...!"

기억이 났다. 국사(國師, 임금의 스승) 민영익의 자제이자 주상전하의 친우. 성균관 대사성 자리에 오른 후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을 넓히겠다며 홀연히 떠났던 이였다.

윤과 그의 겸사복장인 홍시운, 그리고 성균관 대사성 민영후 세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가히 아름다워 흡사 황홀함으로 우거진 꽃밭과도 같다며 그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노라고 중전 간택 당시 다른 소저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 다시 돌아왔나보구나. 헌데 어찌 이 야심한 시각에...'

한편으론 그에게 고마운 생각마저 들었다.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울고 있던 자신의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으니. 어느새 서화는 근엄한 중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붉게 물든 그녀의 눈시울 만큼은 감출 수가 없었다.

이를 본 한 상궁과 박 상궁 또한 그저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키며 교태전으로 향하는 서화의 뒤를 따랐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