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19화 (19/83)

제 19화 - 어긋나는 두 마음

" 아씨. 쇤네가 교태전에 이리 발을 디딜 수 있는 날이 오다니요. 소인, 앞으로 이 한 몸 닳아 재가 되어 날아가는 순간까지 중전마마 곁에서 성심을 다해 모실 것이옵니다."

" 이제는 아씨가 아니라 중전마마라 불러야 한다."

향의 말에 한 상궁이 따끔히 말하자 예, 한 상궁마마 -라며 향이 답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교태전의 전경을 바라보던 서화. 잠시나마 잊고 있던 자신의 처지, 옥에 갇힌 듯한 궁궐의 생활이 또다시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에 헤아릴 수 없는 느낌이 아지랑이 일듯 들면서 서화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답을 찾은 듯 한숨을 쉬며 향에게 말했다.

" 익숙함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로구나."

" 어찌하여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궐이었다. 궐로 돌아가면 다시 사가로 돌아올 수 없을거란 생각에 마음이 옥죄듯 아리고 도망치고 싶단 어리석은 생각마저 들었는데...그런데 막상 돌아오니 나의 거센 바람 앞의 흔들리는 등불같은 처지는 생각치도 않고 오랜만에 마주하는 교태전이 반갑기도 하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단 안도감 마저 들다니, 익숙해지는 것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 아니냐."

서화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런 그녀의 말에 한 상궁과 향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조용히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쓸데없는 일말의 감정에 휩쓸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화는 곧 정신을 차린 뒤 사가에서 가지고 온 짐들을 풀고 대왕대비 처소에 들러 왕실 어른들께 문안인사를 올린 후 윤이 있을 근정전으로 향했다.

" 전하께 아뢰게."

" 예, 중전마마."

오랜만에 보는 임 상선이 서화를 향해 읍을 한 뒤 큰 목소리로 아뢰었다. 안에서 '모시게-'라는 윤의 음성이 들리자 서화가 바스락 거리는 당의 안쪽에 양 손을 넣어 포갠 뒤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 오시었소."

" 예, 전하.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 강녕(康寧)이라...훗.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오."

" 어찌하여 그러시옵니까? 혹여 미령하신 곳이라도..."

서화가 염려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하자,

" 아, 글쎄. 과인이 키우는 흑문조 한쌍 중 한 마리가 골치를 썩여서 말이오."

윤이 비소를 지으며 서화를 쳐다보았다.

" 외로울까 싶어 과인이 일부러 암수 한쌍으로 짝을 지어주었는데 그 중 암컷이 몰래 새장을 탈출해 사라진 것이 아니겠소? 수컷의 가슴깃털이 다 빠져갈 때쯤이 되어서야 암컷은 다시 돌아왔고 새장 안에 다시 넣어주었다오."

" 전하께서 염려가 크셨겠습니다."

" 헌데,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소. 그 뒤로 얼마 안가 암컷이 알을 낳고 부화하여 새끼들이 나왔는데 말이오. 새끼들 다섯 놈들이 하나같이 모두 깃털이 까맣지가 않고 하얗더란 말이오."

" 하오면..."

" 다섯 놈 모두 흰점이 박힌 점박이거나 하얀 것을 미루어 보아 암컷이 가출한 동안 저 바깥 어딘가에서 백문조 수컷과 짝짓기를 한게지. 자신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수컷은 버려두고 말이오. 그리고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돌아와 알을 낳다니. 참으로 앙큼한 것이 아니오?"

' 어떠시오, 중전? 속이 뜨끔하지 않으시오? 낯선 사내와 놀아난 중전이 과인에겐 그 흑문조 암컷과 다를 바가 없다 생각하오만.'

일부러 서화를 곤란케 하고자 꺼낸 이야기였다. 중전이 그리 아둔한 이는 아니니 자신이 흑문조 이야기를 한다면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금세 간파하여 그녀가 겁을 먹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허나 윤의 예상과는 달리 서화는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말도 없었다. 그저 윤이 하는 말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런 서화의 반응이 시원찮게 느껴지자 윤이 길고 가느다란 호선의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 아, 앞으로 중전께서 해주셔야 할 것이 있소."

"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제서야 서화가 눈을 반짝이며 윤과 시선을 맞추었다. 궁궐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해야할 것이 생긴 셈이었다.

" 이레(7일)마다 과인의 시침을 들 여인들을 중전께서 골라 연생전으로 보내주시오."

" 예?"

" 무얼 그리 놀라시오. 중전께선 내명부의 수장이니  과인의 시침을 들 여인들을 들이고 관리하는 것도 당연히 중전의 몫이 아니겠소."

당의 안의 포갠 손 끝이 차가워지며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떨림을 막으려 두 손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꽉 맞잡았다.

" 왜 대답이 없으신게요?"

" ...그리 하겠사옵니다."

" 그럼 이만 물러가서 쉬도록 하시오. 오는 길이 고단하셨을테니."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중전의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자신의 지아비를 다른 여인들과 나누고 자신의 손으로 다른 여인의 치맛품에 안기게 하는 그런.

근정전을 나서는 서화의 얼굴은 창백했다. 어디선가 뜨거운 바람이 서화의 뺨을 데웠다. 분명 뜨거운 바람이 맞닥뜨린 곳은 뺨인데...뺨이 아닌 두 눈이 뜨거워지면서 무언가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주르륵.

자신도 모르게 투명한 눈물 한 자락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이 마저도 아랫것들이 볼까 싶어 재빠르게 손바닥으로 쓸어버렸다.

' 이깟 일에 울어서는 안된다.'

' 임금을 지아비로 두었으니 종묘사직을 위해 많은 후사를 보실 수 있도록 힘써야하는 것은 응당 내가 해야할 일. 나약한 여인의 감정에 사로잡혀 이에 휩쓸리면 안된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내명부의 수장으로써 전하께서 말씀하시기 이전에 내가 이미 했어야 하는 것을...'

그렇게 서화는 밤새도록 피눈물이 흐르는 가슴을 속으로 신음하며 달랬다.

***

서화가 물러가고 근정전에서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읽던 윤은 손에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 제길."

오랜만에 본 중전은 여인의 색이 더욱 짙어진 모습이었다. 막 피어오른 꽃봉오리처럼 화사하였으며 싱그럽고 향기로웠다. 그러한 서화의 모습에 윤의 가슴이 뻐근해질 뻔 했지만 그것이 모두 그 낯선 이방인 사내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울 것 같은 서화의 표정을 보면 속이 시원해질 줄 알았다. 곤란하게 만들어 속이 닳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사내에게 손목을 잡힌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그 잔상은 밤이고 낮이고 윤을 괴롭혔다.

헌데...막상 서화의 파리해지는 얼굴을 보니 자신의 마음도 함께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을 보니 당장에라도 과인이 실언하였소, 미안하오.라며 사과하고 싶어졌다.

" 아니지. 오히려 잘못한 것은 중전인데 왜 과인이 이런 불편한 감정을 느껴야 한단 말이냐."

한 달에 한 번 합방하는 것에 그새 정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중전이 사가에 나가있는 동안 궁궐이 적막하고 조용하게 느껴지기도 하더니. 윤은 자신의 감정을 완강하게 부정하며 자신의 심신이 나약해져 그런 것이라 치부하였다.

" 궁으로 돌아온 걸 환영하오, 중전."

궁이 어떤 곳인지, 중전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서화 자신은 혼인한 아녀자란 사실도. 그녀의 지아비가 이 나라의 지존인 자신이라는 것도. 지존을 지아비로 둔 지어미는 다른 사내를 품어서도, 만나서도, 다가가도 안 된다는 것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