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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궁궐의 봄-18화 (18/83)

제 18화 - 어미의 마음

사가에서의 달콤한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너무도 빠르게 흘러만 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다시 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 되었다.

아침 일찍 조수라를 들일 때부터 훌쩍이는 유모와 눈시울이 붉어진 향. 거기다 부쩍 어깨가 쳐지고 근엄함이 묻어나던 풍체가 여윈 듯한 부원군까지 안색이 어두웠다. 궁궐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서화의 마음이 돌덩어리를 수북히 얹은 것 마냥 무거워졌다.

" 흐윽...흑..흑..."

" 울지마, 이것아. 뭘 그리 우는 게야."

유모가 향에게 지청구하자 향이 고개를 떨구며 소매로 눈물을 얼른 훔쳤다.

" ...향아. 아니 박 상궁."

서화가 향을 '박 상궁'이라 불렀다.

" 예, 중전마마.."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무를 수 있단 말일세. 유모와 함께 남아있고 싶다면 그리 하게. 일전에 내가 말한 것은 절대 강요한 것이 아니야. 그러니 자네 마음이 가는대로 하게. 나도 유모 마음 아프게 하며 떠나는 것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니..."

***

얼마 전, 사가에서의 첫 날 밤, 서화는 한 상궁과 함께 유모와 향을 불렀다.

" 부르셨습니까, 중전마마."

유모와 향 모녀를 지긋이 바라보던 서화가 운을 뗐다.

" 유모. 그리고 향아. 내 할 말이 있어 이렇게 다들 한 자리로 불렀네."

" 말씀하시옵소서."

" ...유모. 자네의 여식을...향을...나에게 맡겨주겠는가?"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유모는 서화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았다.

" 가례를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궁궐의 웃전들과 담소를 나누다 사가에 죽마고우처럼 자란 친우이자 친  매妹 (여동생) 같은 아이가 있다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네. 그런데 그것을 기억하시고 계시던 대왕대비마마께서 이번에 궐로 돌아갈 때 원한다면 함께 입궁하여 내 곁에 두어도 된다고 친히 윤허하시었네. 그것도 나인이 아닌 상궁으로 말일세."

" 마마..."

유모가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동공이 눈발흩날리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 내, 강요하는 것은 절대 아닐세. 향과 맺어주려 하였던 이가 예전에 두창으로 이미 세상을 뜨고 말았지 않았는가. 그 뒤로 이 아이가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아니 주고 있으니... 벌써 향의 나이도 과년한데 이대로 사가에서 사는 것보다는 나와 함께 궐로 들어가서 사는 것은 어떠한지 그저 한 번 물어보고자 함이네."

" ..."

" ..."

유모와 향이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을 수그리고 있자, 서화가 알았다는 듯다시 입을 열었다.

" 사가에 남아있겠다 해서 서운해하진 않을 것이니 그건 염려치 말게. 유모도 향이 곁에 있는 것이 좋겠지. 궁으로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할텐데 모녀간의 생이별이 달갑지 않을게야. 나 역시 그저 홀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적적하여 철 없는 소리를 내뱉은 것이니 부디 내 오늘 한 말은 잊어주시게."

서화가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향이 자신과 함께 궁궐에 들어간다면야 더할나위없이 든든하고 의지가 될 것이 자명하였다. 허나,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평생 자신을 길러주고 보듬어준 유모와 향을 갈라놓는 것은 서화에게도 결코 편치 않았다.

" 보내겠습니다."

" 응?"

적막을 깨뜨린 것은 다름아닌 유모였다.

" 향을 중전마마와 함께 보내겠사옵니다. 저 모자란 것이 궁에 들어가 중전마마께 누를 끼치진 않을까, 왕실 어른들께 실수를 범하진 않을까 늘 노심초사 하겠지만, 중전마마께서 부디 제 부족한 여식을 거두어 주셔요."

" 유모..."

" 엄니..."

" 너도 사실 중전마마를 따라가고 싶어하지 않았누. 중전마마가 교태전에 드신 후 중전마마를 그리워하며 밤마다 훌쩍인 것을 알고 있다. 아마 네가 궁에 들어가기엔 홀로 남은 이 어미가 마음에 걸려 지금 이리 망설이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부원군 대감께서 잘 보살펴 주시고 중전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따뜻한 밥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고 아픈 곳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말고 중전마마 입궁하실적에 따라가거라."

" 유모..."

" 흑..흑흑...엄니..."

양반과 천민의 차이라 하나 유모 자신에겐 서화도 향도 모두 자신의 젖을 먹여 키운 자식들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어미'의 마음을 서화에겐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으나, 서화가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화가 겪을 마음고생에 기쁨보다 슬픔이 앞섰다.

자신이 배앓이를 하여 낳은 자식인 향이 궁에 들어간다면 당연 보고싶을 것이다. 미치도록 그리울 것이다. 하지만 영영 헤어지는 것은 아니니...

험한 궁궐에서 서화와 향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해서, 자신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다면...그것만으로도 족했다.

" 중전마마. 향을...잘 부탁드립니다."

" ...고마워....정말 고맙네...내 유모와 향에게 입은 은혜는...절대 잊지 않겠네."

끝내 서화마저 울먹이는 목소리로 유모와 향의 손을 잡아 안으며 말했다.

***

" 엄니...부디 무탈하셔요. 제가 종종 기별을 넣을 터이니..."

" 내 걱정일랑은 말고 중전마마 보필하는데에만 집중하려므나. 그 어떠한 것에도 휘둘리지 말고, 휩쓸리지 말고, 그저 중전마마의 안위만 생각하며 모셔야 한다."

" 예, 엄니..."

" 그리고...이거."

유모가 수줍은 듯 하면서도 커다란 보따리 두 꾸러미를 가져와 향에게 한 개를 건네고 나머지 하나를 서화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 이 것이 뭔가?"

" ...비단 이불이어요."

" 이불...?"

" 민가에선 여인들이 시집을 가게 되면 친정어미가 원앙비단이불을 만들어 여식의 손에 들려보낸다지요. 중전마마께서 궁에 들어가시게 될 줄 모르고 오래전부터 틈틈이 만들어온 것인데 중전마마께서 사가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밤낮 매달려 만든 끝에 겨우 어젯밤이 되어서야 완성하였습니다. 궁궐의 침방 나인들이 만들어 올린 금침에 비하면 비루하고 추레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허나 쇤네가 정성어린 마음으로 품앗이나 허드렛일을 하여 받은 삯을 모아 사고 만든 것입니다. 비록 최고급 비단은 아니더라도 중전마마를 생각하며 만든 소인의 마음만큼은 이 세상의 그 어느것보다도 깊고 진하니 부디 제 마음을 받아주시옵소서."

" 유모..."

" 부부인 마님께서 살아계시었더라면 이보다 훨씬 더 곱고 어여쁘게 만들어주시었을텐데 소인이 가진 것이 별로 여의치 못하여...그리 해드리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 아니야...아닐세...내게는 이 이불이...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네."

서화의 마음이 뜨거워지다 못해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유모의 서화를 향한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서...뜨거워서...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들의 곁에 서 있던 한 상궁도 말없이 몰래 눈물을 훔쳤다.

" 향아, 너도 두꺼운 솜을 넣어 옷 한 벌 지었다. 곧 겨울이 오면 추워질텐데 고뿔 걸리지 않게 잘 입으려무나."

유모는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동안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며 애지중지 키워온 두 보물이 어느덧 장성하여 품을 떠나가는 것을 그들의 뒷모습이 좁쌀보다 작아질 때까지 눈에 오래도록 담으려 애쓰고 또 애썼다. 눈물이 눈앞을 가려 그들의 모습이 흐려지는 것도 용납치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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