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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궁궐의 봄-17화 (17/83)

제 17화 - 가시를 품은 꽃은 아름답노니

" 아씨.빨리 쇤네와 두 손가락 걸고 약조해 주십시오. 다시는 혼자 사라지시지 않으시겠다고요."

코 끝이 빨개진 향이 서화에게 손을 들이밀며 말했다.

" 미안해. 내가 정말 잘못하였다."

" 아씨께 무슨 변고라도 생겼더라면...저는 목을 콱 매고 죽어버렸을 거여요."

어찌나 놀랐던지 향은 서화가 자리에 누울 때까지 곁에서 조잘조잘 대며 으름장을 놓았다.

" 그만해라. 중전마마 고단하시다. 네가 그리 옆에서 지분대니 중전마마께서 침수에 드시질 못하고 있지 않느냐."

유모가 향을 말리자 그제서야 향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처소로 물러갔다.

어찌나 피곤하였던지, 윤과 혼례를 올리던 그 날보다 몸이 더욱 피로한 것 같았다. 밀려오는 졸음에 서화는 금세 잠이 들고 말았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서화가 누워있는 방 안으로 들어오는 조심스런 인기척이 들렸다. 잠결에 들은 소리라 실제인지 꿈결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열린 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는 것이 꿈은 아닌 듯 했다. 누구인지 눈을 게슴츠레나마 떠보려 했지만 눈두덩이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스륵.

병풍을 보고 옆으로 누워있는 서화의 등 뒤에 누군가가 앉았다. 낯선이의 자그마한 숨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서화는 두 주먹을 꽉 쥐고 긴장하였다.

그런데...

" 다행이야...참으로 다행이구나..."

따뜻한 음성이 서화의 심장을 적셨다.

" ......!"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토록 그리워하던 것이었는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 손길을...이 온기를...언뜻 스쳐 들리기만 해도 목부터 메어오는 음성을...

밤마다 소리없이 슬그머니 들어와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어루만지던 거치질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따스하고 부드러운 자신의 아비의 손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 아버님...'

조금이라도 아비의 손길을 느끼고 싶은 욕심에서 일까.  어느덧 정신이 온전히 깨어났음에도 왜인지 모르게 자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죽은 듯 잠든 척 하며 누워있는 서화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는 아비의 투박한 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그간의 힘들었던 궁궐에서의 서러움이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꾹 감은 눈 사이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왔지만 행여 아비가 눈치챌까 닦아내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가만히 있었다.

"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이 아비는 절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네가 없는 세상은 금은보화도, 이 큰 집도, 부원군이란 자리도 모두 부질없다. 널 잃고 내가 죽는다 한들 무슨 낯으로 네 어미를 보겠느냐..."

" ..."

" 아프지 말아라...다치지 말아라...너는 이 아비의 존재의 이유이니..."

" ..."

" 너는 내가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이유이다."

" ..."

"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주어...고맙구나."

어둠 속에 등을 돌리고 있던 터라 아비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여느 때보다 물기가 젖어있는 아비의 목소리만큼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아버님...심려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서화는 부원군이 앉아있던 자리가 싸늘히 식어갈 때까지 울음을 참다 한참 후에서야 참았던 울음소리가 봇물 터지듯 터졌다. 행여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갈까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어깨까지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

" 세르샤님! 대체 어디를 다녀오시는 겁니까! 타국에서 아무런 호위도 없이 사라지시다니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는 바람에 단주님과 제가 얼마나 곤혹을 치루었는지 아십니까? 분명 상단의 호위 하에 계시기로 대방 어른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이리 제멋대로이십니까!"

" 자네와 단주가 입만 다물고 있는다면 바흐람이 알게 되는 일은 없을 걸세. 안 그런가, 아르샨?"

세르샤가 상단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쏟아놓는 아르샨의 말에 지루하단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대방 어른이 아셨다면 단주님을 비롯해 제 두 다리까지 모두 분질러 버리겠다 하셨을 겁니다. 그토록 세르샤님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모시라 하셨는데 조선에 당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사고를 치시다니...여차하면 제 목이 떨어져 나가는 건 시간문제겠습니다!"

" 걱정 말게. 내 자네 목은 꼭 그 퉁퉁한 몸뚱아리에 그대로 붙어있게 해줄테니."

" 앞으로는 절대!절대!! 혼자서 외출하시면 안됩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라도 세르샤님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니 절 따돌리고 또 도망가실 생각일랑은 고이고이 접어두십시오!"

" 아이고...알았네, 알았어. 자네 배고프진 않나? 여기 자네가 좋아하는 조선의 평과苹果 (사과)일세. 내가 특별히 자네를 위해서 구해온 것이니 맛있게 드시게."

" 예? 평과요? 이리 귀한....흡"

다짜고짜 아르샨의 입에 먹음직한 평과 하나를 통째로 쑤셔넣는 세르샤. 그제서야 조용해진 아르샨의 입에 흡족하였는지 침상에 드러누웠다.

" 우적우적...그런데 오늘 하루종일 어디에 계시다 온 것입니까?"

아르샨이 평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입을 나불거리며 물었다.

" 꽃 한 송이와 어울리다 왔네."

" 꽃이요?"

" 그래. 꽃. 그 아름다움에 취해 넋을 빼앗겨 그만 시간이 그리 흐른 것을 한참 후에 깨달았지 뭔가."

꽃은 내가 머리에 꽂을 지경이구만. 무슨 꽃이길래 대체 세르샤님이 저리 흐뭇한 표정까지 지으시는걸까?

아르샨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 어떤 꽃이길래 그리 미소를 지으시는 겁니까? 그리 곱고 아름다운 꽃이었습니까?"

"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네. 헌데 그 꽃은 보기보다 가시가 많아 참으로 다가가기 어려웠다네."

" 허면, 해당화나 찔레꽃 같은 꽃인가 봅니다."

" 감히 그것들에 비교할 바가 안되었네."

아르샨이 옆에서 뭐라 떠들던 이미 오늘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세르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 ...향. 또 만날 수 있으려나.'

***

" 전하."

" 아무말도 하지 말라."

" 필시 중전마마께서도 무언가 사정이 있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 아무말도 하지 말라 하였다."

" 중전마마께선 행실이 바르시고 어진 분이십니다. 그러한 분께서 밤에 외간 사내와 함께 계셨다면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 피치 못할 사정? 타국의 사내가 혼인을 한 아녀자의 팔을 그리 낚아채는 것이 피치 못할 사정이란 말이냐? 너도 그 광경을 보지 않았느냐? 듣기 싫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으니 너도 그만 물러가라."

" ...예."

겸사복장 홍시운은 대전을 빠져나왔다. 여느 때 같았다면 늘 그의 뒤에서 소리 없이 모습을 숨기고 있었겠으나 윤의 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여 어쩔 수 없이 대전 밖으로 나왔다.

" 후우...저리 곡해하시면 아니되실터인데..."

서화의 어진 성품은 궁궐 내에서도 자자하였다. 그런 여인이 전하께서 곁을 내어주시지 않는다 하여 다른 생각을 품고 그리 할리가 없었다.

하루빨리 두 마마의 관계가 다복해지길 바라는 시운은 자꾸만 어긋나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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