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16화 (16/83)

제 16화 - 소란의 매듭

" 여기있소."

파사국 사내가 어디선가 구해온 꽃신 한 켤레를 서화에게 대뜸 내밀며 몸을 아래로 숙였다.

" 뭐, 뭐하는 짓이오!"

행여 그가 헛짓거리라도 할까 싶어 흠칫한 서화가 몸을 뒤로 빼려 하자 파사국의 사내는 서화의 치맛단 밑에 숨어 있는 발을 잡아 끌며 꽃신을 신겨주었다.

" 그런 모습으로 댁으로 돌아갔다간 그 댁 식솔들이 모두 놀라 자빠질 것 아니오. 명색에 체면을 그 어느 것보다 중하게 여기는 양반댁이니 행색은 멀쩡히 하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 ...그..그건 그렇소만..."

" 그러니 잔말 말고 어서 신으시오. 나도 오래 무릎을 구부리고 있으려니 허리 아프오."

툴툴 거리면서도 서화의 발목을 다정하고 조심스레 끌어 당기는 파사국 사내의 손길. 버선 위로 그의 따뜻한 온기가 뭉근하게 전해졌다.

"...고맙소."

한편으론 사내가 떠난 길 그대로 가버리지 않고 다시 돌아와준 것이 고마웠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잔뜩 긴장해있던 마음이 눈녹듯 사르르 풀렸다.

" 댁이 어디시오?"

" ...잠시 좌찬성 대감댁에 머물고 있소."

행여 자신이 좌찬성 윤성한의 여식이라는 것을 알면 중전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질까 걱정된 서화는 일부러 부원군 댁이 아닌 좌찬성 대감댁이라 칭하며 '잠시' 머무는 것이라 하였다.

" 오늘 신세진 빚도 있으니 모셔다 드리겠소. 길이 어두워 날 뒤에서 쫓아오다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먼저 앞장 서시오. 내가 그대를 뒤따르리다."

파사국 사내가 먼저 앞서라는 시늉을 했다.

" 아, 아니오.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소."

" ...아깐 길을 모른다 하지 않았소?"

" ......"

" ...큭...괜한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앞장 서시오."

" ...알겠소."

파사국 사내가 웃음을 참는 듯 보이자 서화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부아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딱히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 처지였기에 군말없이 그가 하라는 대로 앞장 섰다.

파사국 사내의 지시대로 한참을 꼬불꼬불 휘어진 길들을 따라 걷다보니 점차 익숙한 거리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못가 친정의 대문앞에 다다랐다.

" 다왔소. 여기까지 동행해주어 고맙소."

" 그런 말 마시오. 오늘은 내가 크게 빚졌소. 내 나중에 반드시 꼭 갚으리다."

...난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소.

오늘의 고생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져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궂은 일 한 번 하지 않고 자란 양반가의 여식. 곱게 자라온 탓에 오늘의 일은 몸이 무척이나 고단하게 느껴지는 터였다.

거기다 하얀 종이 위에 톡. 하니 먹을 머금은 붓으로 찍은 듯한 눈동자, 무엇이 그리 웃기고 즐거운지 연신 싱글거리는 입매, 다소  부정확한 발음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사내. 초면부터 거리낌 없이 구는 그가 불편했다.

어디 그 뿐인가. 외간 남자와 엮이는 것도 불경한 일인데 타국의 사내라니. 야밤에 누군가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간 겉잡을 수 없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질 것이 자명했다.

" 그럼, 잘 가시오."

서화는 서둘러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러자,

" 내 이름은 세르샤요. 그대의 이름은?"

파사국의 사내가 서화를 붙잡으며 물었다.

" ...향."

서화가 사라지자 세르샤는 그녀가 들어간 대문을 그윽히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 향...향이라.'

***

" 가자."

" 저...저하."

"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가 날을 잘못 잡은 것 같구나. 우리도 이제 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시각이 많이 지체되었다."

" 저하!"

윤이 입고있는 사대복장의 비단자락이 나부끼는 바람에 펄럭였다. 여간해선 당황하는 법 없는 겸사복 홍시운이 허겁지겁 윤의 뒤를 뒤따르며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번복하지 않는 성정의 임금이란 걸 잘 아는 홍시운은 그를 붙잡는 것을 포기한 채 그저 묵묵히 앞만 바라보며 걸음을 빨리 할 뿐이었다.

' 파사국에서 온 사내와 중전의 밀회라. 아무것도 모르고 조용한 순진한 중전의 이면에 저런 모습이 있었을 줄은...내가 한 방 먹었군. 하!'

주포에서 두 나그네의 잡담을 듣다 주모가 내어 온 국밥으로 배를 두둑히 채우고 좌의정이 사는 곳과 도성으로 들어온 파사국의 상단이 자리한 곳을 한 번 염탐하듯 스쳐 지나가볼까 하여 발걸음을 하였더랬다.

그런데 마침 가는 길에 익숙한 뒷모습의 여인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 ...중전? ...그리고 사내라. 그것도 이방인인...'

가채를 쓰고 있지 않았다 하나 매일 아침 대왕대비전에 드나들고 한 달에 한 번씩 합방하며 눈에 익은 것이 서화의 뒷모습이었다.

소리없이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며, 곧게 뻗은 목선, 가녀린 듯 하면서도 알맞은 호선 모양을 그리는 양 어깨는 서화가 틀림 없었다.

거기에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조선의 의복과 다른 형태의 복장을 하고 있는 이. 그것도 사내였다. 사내가 서화의 팔을 붙잡는 것을 보니 둘의 사이가 여간 보통이 아닌 듯 했다.

' 얌전한 괴인줄 알았더니 앙큼한 도둑괴로구나. 자칫하면 과인이 속을 뻔 하였어.'

선녀같이 고운 자태의 모습에 숯기조차 없어 그저 여리고 정숙한 여인인 줄로만 알았다.

자신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나 서화는 온 백성이 아는 그만의 여인이었다. 반드시 오롯이 그의 여인이어야만 했다. 일국의 어미이며 자신의 지어미로 살아야 하는 여인이니까.

알 수 없는 소유욕에 불타오르며 윤은 입꼬리를 비틀며 생각했다.

' 절대로 두 사람이 놀아나게 두진 않을 것이다. 중전은 혼인한 몸으로 외간 사내와 밤이슬을 맞으며 밀회를 즐기며 사가 나들이를 허락한 과인과 웃전어른들을 우롱하였다. 내 오늘의 치욕은 잊지 않을 것이오, 중전.'

***

" ...향."

그리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더 이상 평범한 윤서화가 아니었으니까. 자칫 타국의 사내에게 본명을 알려주었다가 자신의 이 경솔함이 윤과 대비, 대왕대비를 비롯해 자신의 사가 식솔들에게까지 누를 끼치고 화가 들이닥치진 않을까 하여 자신의 이름을 '향'이라 알려주었다.

자신을 무사히 사가로 돌려보내주었으며 더욱이 먼저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며 묻는 사내의 물음을 물리칠 수 없었다.

' 세르샤...타국의 이름은 참으로 재미나는구나.'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잠시, 눈물 범벅이 된 한 상궁과 유모, 향이 서화를 발견하곤 한달음에 뛰쳐나왔다.

" 중전마마!!!!!"

" 아씨!!!!!!!!!!!!!!!!!!!!!!!!!!!!!!!!!!!!!!!!!!!!!!!!!!!!!아이고!!! 아씨!!!!! 엉엉엉..."

다리에 힘까지 풀린 향은 그만 서화의 앞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펑펑 오열하며 울기 시작했다.

" 대체 어디에 다녀오신 것입니까!!! 그리 말씀도 아니하시고 사라지시다니요!"

한 상궁이 붉게 물든 눈으로 서화에게 말했다. 냉정함을 잃지 않고 침착하기 그지없던 한 상궁이 저리 음성을 높이는 것을 보니 여간 걱정한 것이 아닌 듯 했다.

" 미안...내가 미안하네. 인파에 휩쓸려 그만 다른 곳으로 흘러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네."

" 아씨, 제발 다시는 사라지지 마시어요. 쇤네가 옆에 실과 바늘처럭 찰싹 붙어있을 거여요."

향의 투정어린 말에 서화는 미안했다. 향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속이 타들어가도록 발을 동동구르고 있었을 자신의 사람들 모두에게.

" 아버님은...?"

" 아직 궐에서 퇴청하지 않으셨는지 아직까지 안 돌아오셨습니다. 집안의 사람들을 풀러 온 마을을 이잡듯 뒤지고 다니며 중전마마를 찾고 또 찾는 중이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소인은 마침 궁궐로 돌아가 전하와 부원군대감께 이를 아뢰려던 참이었습니다."

한 상궁이 말했다.

" 미안하네...한 상궁. 미안해, 유모..그리고 향아. 내 잘못으로 인해 이리 여러 사람을 고생시키다니...정말 자네들 볼 낯이 없네."

" 그런 말씀 마시어요..이리 무사히 다친 곳 없이 돌아오셨으니 그걸로 저희는 안심입니다. 아이고..밤바람에 손이 차갑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유모가 서화의 손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방안으로 이끌었다.

한 바탕 지옥을 오가며 끌탕을 한 세 여인들의 초췌한 모습을 보자 서화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은 여인들에 의해 방 안은 금세 부드러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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