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13화 (13/83)

제 13화 - 스며드는 마음

" 그렇게 하시오."

" 이리 윤허해 주시어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 그럼 잘 다녀오시오. 부원군께서도 좋아하시겠군. 오랜만에 여식을 만나게 되셨으니."

" 예, 전하. 그럼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서화가 아침일찍 윤을 찾았다. 마침 그도 아침 수라를 먹고 상을 막 물린 참이었다.

예상하였듯, 윤은 별다른 말 없이 서화의 사가 외출을 허락했다.

차가운 물에 면포를 적셔 눈 위에 얹어놓았어도 밤새도록 울어 눈이 퉁퉁 붓고 눈가가 빨갛게 부푼 것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어쩔수 없이 그 모습 그대로 강녕전을 찾았지만 윤은 그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아니, 서화의 얼굴을 제대로 한 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사가 나들이 허락을 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였다.

강녕전을 빠져나온 서화가 긴장했던 듯, 크게 심호흡을 하며 어깨를 폈다.

" 중전마마. 혹시 어디 편치 않으신데라도 있으십니까."

" 아닐세. 그저 조금 몸이 곤하여 그러는 것이야."

" ......"

" ...한상궁."

" 예, 중전마마."

" 난 이제 강해질걸세. 하늘이 맺어주신 부부의 연이야 죽어서도 끊을 수 없다하지만 앞으로는 잔 파도가 쉴새없이 밀려온다 하여도 주저앉지 않을 것이야. 보란듯이 더욱 꼿꼿하게 버틸 것이네."

'전하가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다 하여, 나를 돌아봐주시지 않는다 하여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야. 난 교태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 하며 내 길을 갈게야.'

다짐하듯 말하는 서화의 표정은 사뭇 비장해보이기까지 했다.

교태전에 돌아가 당의를 벗고 주황색 치마와 보라색 저고리를 입었다. 대비마마에게서 하사받은 홍옥 장식이 달린 노리개까지 곱게 매고선 교자에 올랐다.

' 아버님.'

원성부원군.

그것이 좌찬성 윤성한의 새로운 칭호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집 앞에 가마가 서자 갑자기 밀려오는 안도감과 그리움이 뒤섞여 눈물이 핑 돌았다. 대문을 넘으니 오랜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들이 있었다.

" 아씨!!!!"

" 아씨가 뭐냐 이것아! 중전마마시다!!"

향의 말에 유모가 퉁을 주었다.

서화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는 향과 유모. 집안 식솔들...그리고...너무나 눈에 띄게 노(老)해져 버린...자신의 아버지.

" 아버님..."

" 안으로 드시지요, 중전마마."

부원군 윤성한이 허리를 숙이며 서화를 안채로 안내했다.

" 아버님...왜 이리 수척해지셨어요..."

" 아닙니다. 요 근래 고뿔에 걸려 며칠 고생해서 그럽니다. 좀 더 쉬면 나아지겠지요."

그토록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 다짐하고 염원했던 서화였다. 중전간택을 위해 집을 나섰을 때만 해도 이리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 아버님. 말씀 편하게 해주셔요."

" 어찌 이 나라의 지대하신 국모이자 주상전하의 지어미이신 중전마마께 소신이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오랜만에 집에 와 아버님께 살짝 투정을 부려보는 서화. 그러나 바램과는 달리 그는 매정하리만치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냉정한 아비의 태도에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론 섭섭함이 드는 못난 마음...

' 왜 이리 섭섭한 마음이 드는게야...'

하지만 부녀의 애틋한 재회 앞에선 중전마마와 부원군이란 수식어는 맥도 못 추고 금새 떨어져 나갔다.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눈길을 하염없이 주고받으며 그간의 빈자리에 대한 공허함을 메꾸어 나갔다.

***

" 아씨...아니, 중전마마. 혹 방이 추우십니까."

향이 '중전마마'라 부르는 것이 어색한지 아씨라 부를 뻔한 자신의 입을 콩-하고 때리며 말했다.

" 아니. 괜찮아. 한 상궁, 자네도 이젠 물러가 쉬게. 여긴 나의 사가이니 나도 모처럼 편하게 쉬다 갈 것이야. 중전이란 자리도 잠시 내려놓고 말일세."

" ...그리 하겠사옵니다, 중전마마.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갈 터이니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부르시옵소서."

" 그리하겠네. 고마우이."

여느 때 같았으면 서화의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을 한 상궁이지만 오늘은 군말 없이 물러갔다.

그간 궁안에서 마음고생한 자신의 웃전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잠시 쉴 수 있도록.

" 중전마마, 이제 그만 침수에 드시는 것이..."

향이 서화에게 말했다.

" 향아."

서화가 향을 불렀다.

" 예, 중전마마."

" 이곳에 있는 동안은 그냥 예전처럼 '아씨'라 불러줘."

" 네? 그건 아니됩니다, 중전마마! 부원군 나리께서 아시면 소인에게 경을 치실 것입니다."

" 내 청이야. 우린 벗이잖니. 이곳에 있는 동안만큼은 나도 옛날로 돌아가 지내고 싶구나."

" ......"

불쌍한 우리 아씨...중전마마. 그간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셨으면.

향은 서화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 알겠습니다, 아씨. 이 곳을 떠나실 때까진 그리 부르겠사옵니다."

" 그리웠어...너와 유모가 날 불러주던 목소리가. 그리고 내가 머물던 이 방이..."

'아직은 너와 유모가 날 '중전마마'라 부르는 것이 마치 내 것이 아닌 것 처럼 마냥 불편하고 옭아매는 것 같구나. 그러니 내가 다시 궁궐로 돌아갈 때까지 예전처럼 아씨라 불러달라 억지부리는 나를 부디 이해해주련..'

서화가 향과 그간 집안에서 일어났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최씨 아범의 딸 금막이가 옆 마을의 총각에게 시집 간 이야기, 어미인 유모와 나물 캐러 산에 올랐다 길을 잃어 밤을 꼬박 지새우고서야 다시 마을로 내려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

예전같았음 쉴새없이 나불거리는 향에게 퉁박을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 마저도 반갑고 마냥 좋았다.

그 때였다.

" 중전마마. 잠시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 들어오게."

향의 어미이자 서화의 유모인 강씨가 서화의 방으로 들어왔다.

" 이 야심한 시각에 침수에 드시지 않고 어찌 저를 부르셨습니까."

" 모녀가 왜 이리 내 잠 걱정들을 하누. 하나도 곤하지 않으니 염려치 말게."

서화가 웃으며 유모 강씨에게 말했다.

" 사실은...내 오늘 향과 유모에게 물어보고 청할 것이 있어 이리 오라 불렀네."

" 네? 쇤네들에게 어찌 중전마마께서 청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그저 하명하시지요. 저희는 중전마마의 사람입니다. 중전마마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따를터이니 말씀하시어요."

유모 강씨가 말했다.

" 유모...그리고 향아..."

서화가 유모 강씨와 향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 그게 말일세..."

서화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침묵만이 맴도는 방안에서 세 사람은 갈 곳 잃은 눈동자만을 굴리며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시운아."

늦은 시각까지 서책을 읽던 윤이 시운을 불렀다.

" 예, 전하."

소리없이 숨어있던 그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며 고개를 조아렸다.

" 잠시 나가자꾸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 예, 전하."

무언가 가슴에 갑갑한 것이 들어찬 것처럼 느껴질 때면 자신에게 산책을 권하는 윤의 마음을 읽은 홍시운은 임 상선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고선 윤의 뒤를 따라나섰다.

천월각으로 향하던 두 사람. 그 때 윤이 말했다.

" 오늘따라 궁궐 안이 조용한 듯 하군."

" 중전마마께서 사가로 나가시어 그러한 듯 하옵니다."

" 큭...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것인가. 참으로 웃기구나, 시운아. 그이가 떠나가고 저렇게 다른 여인이 교태전의 자리에 앉은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건만. 그 여인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이리 티가 나는 것이 말이다."

" ..."

" 내일은 잠행을 나갈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고 준비토록 하라."

" 예, 전하."

' 정말 교태전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기에 이리도 궁궐이 휑하게 느껴지는 것이냐. 그럴리가 없다. 궁궐엔 할마마마도 어마마마도, 후궁들도 여럿 있거늘. 그저 내 마음이 허해진 것이야.'

갑자기 그의 몸을 휘감싸는 공허함. 그리운 이를 생각할 때면 오는 천월각에서 어느새 다른 여인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한 윤은 이번에도 허해진 자신의 마음을 탓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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