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화 - 상처는 깊어져만 가고
" 한 상궁. 밖에 있는가."
" 예, 중전마마."
드르륵-.
서화의 부름에 한 상궁이 허리를 굽히며 모습을 드러냈다.
" 부르셨사옵니까, 중전마마."
" 지금 전하께선 어디에 계시는가."
" 석강을 마치신 후 사정전에 머무르시다 지금 막 강녕전으로 납시셨다 하옵니다."
" 그럼 강녕전으로 갈 채비를 해주게. 내 주상전하께 사가로 나가는 것을 고하고 윤허받으려 하노니."
" 예, 중전마마."
강녕전으로 향하는 서화의 마음은 그 여느때보다 들떠 있었다. 무섭고 어려운 지아비이나 자신의 친정나들이를 불허할만큼 매정하신 분은 아니시라 생각하며 강녕전으로 향했다.
헌데 강녕전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할 임 상선도, 제조상궁 김씨도, 대령상궁 신씨도 온데 간데 없고 어린 나인 둘이서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 주상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서화가 물었다. 그러자,
" 그...그것이..."
한 나인이 몹시 당황한 듯 어쩔줄을 몰라하며 머뭇거렸다.
" 어허! 중전마마께서 하문하시는데 어찌 감히 아뢰지 않는게냐!"
한 상궁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나인을 나무랐다.
" 주...주상...전하께서는...경성전에 계시옵니다."
나인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 서소침에 말이냐."
" 예."
" 그리 가자."
경성전이라면 강녕전을 더불어 연생전, 연길당, 응지당 모두를 포함한 모두 임금의 개인 처소였다. 거리도 근접해있어 서화는 궁인들을 이끌고 경성전으로 향했다.
***
경성전에 가까워지자 익숙한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 중전마마."
임 상선이 버선발로 뛰어내려와 서화를 맞이했다.
" 전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 예, 중전마마."
" 내 전하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 왔네. 그러니 고하여 주시게."
" 중전마마. 송구하오나 전하께선 지금 막 침수에 드셨사옵니다."
임 상선의 말에 서화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 그러한가."
" 예, 중전마마. 오늘은 이만 교태전으로 돌아가시었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오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내일 아침 동이 트고 대왕대비와 대비께 문후인사를 드린 후 사가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리 되다니.
어서 빨리 아버지를 뵙고 싶은 마음에 애가 끓었다.
'허면 어찌한단 말인가. 정녕 내일 아침에 다시 전하를 뵙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 알겠네. 그럼 내일 다시 오겠네."
이내 서화가 체념한 듯 말했다.
" 살펴가시옵소서, 중전마마."
임 상선이 고개를 숙여 읍을 하였다.
발걸음을 돌려 교태전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서화의 뇌리에 문득 의문 하나가 스쳤다.
" 그런데 임 상선."
" 예, 중전마마."
" 전하께선 어찌하여 서소침에 드신 것인가."
" 그...그것이...송구하오나..."
그 때였다.
" 하읏..."
등불이 꺼진 경성전 안에서 여인의 울음섞인 교성이 튀어나왔다. 희미한 소리였음에도 서화의 귓가를 정확히 파고든 여인의 목소리.
" ...그러한 것인가."
서화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리하여 전하께선 강녕전이 아닌 이곳에 드신 것이로군."
내 이제야 알겠으니.
여인을 취하는 밤엔 강녕전이 아닌 경성전이나 연길당, 응지당에서 침수드신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 중전마마..."
한 상궁이 되려 떨리는 목소리로 서화를 불렀다.
" 난 괜찮으니 염려말게. 임 상선. 내가 오늘 전하를 뵈러 왔었다는 것은 못본 것으로 해주게. 가자."
서화는 중전의 체통을 잃지 않으려, 무너지려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며 교태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따뜻한 국화차 좀 대령할까요, 중전마마."
" 그리해주게."
교태전으로 돌아온 후 안색이 파랗게 질린 서화가 염려된 한 상궁은 국화차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제서야 비로소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윤이 여인을 취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바. 그러나 그 소리를 직접 듣고 겪고나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아팠다.
" 흐윽...흑..."
서화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방울이 터져버렸다.
혹시라도 아랫것들에게 들릴까싶어 숨죽여 우는 서화. 중궁전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이미 너무 지쳐버린 터였다.
" 흑...흑흑..."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고 취하는 윤으로 인해 억장이 무너졌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봐준 적 없는 윤이 야속했다.
그러한 까닭은 깨닫지 못한 채.
그러는 한편, 자신의 웃전이 숨죽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문 밖에서 한 상궁은 식어가는 국화찻잔을 든 채 하염없이 안타까워하였다.
***
한 여인이 슬피 눈물을 흘리는 줄도 모른 채-
경성전 안에선 남녀의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 허억...헉..."
" ......으읏..."
여린 소녀가 사내의 거친 움직임을 안간힘을 다해 참아내며 버티는 중이었다.
' 합궁 중에는 반드시 불을 전하께서 너의 몸을 보지 않으시도록 해야하고, 반드시 임금의 왼쪽에 누어야만 한다. 또한 합궁 중에는 눈을 뜨고 전하를 바라보아서도, 소리를 내어서도 아니될 것이며 절대로 전하의 옥체에 손을 대서도 아니된다. 전하의 옥체 위에 올라가서는 결코 아니되며 전하의 움직임에 몸을 흔들고 떨었다간 네 목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명심하거라.'
소녀의 머릿속엔 대령 상궁 신 씨의 엄령이 맴돌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교성이 나올라치면 자신의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윤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더욱 크고 거칠게 움직였다.
" ...읍...읏..."
" 후읏..."
" ......읏..."
" 신 상궁이 또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며 가르친 모양이군. 그럴 것 없다. 네 신음소리를 들려다오."
" 읏......흐읏..."
윤의 말에도 어린 소녀는 입술을 앙 다문 채 눈을 꾹 감았다. 이에 달리할 방도가 없는 윤은 소녀의 몸을 집중하며 탐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모든 것을 쏟아부은 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런 그의 곁엔 떨리는 몸에 힘을 꽉 주고 떨림과 울음을 참는 소녀가 있었다. 윤이 움직일 때마다 흠칫하면서도 놀라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이는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켜 윤의 아랫도리를 더욱 묵직하게 만들었다.
본능에 따라 또 다시 소녀 위에 자리한 윤. 어두운 방안에서도 겁먹은 소녀의 눈망울이 희미하게 보였다.
자신의 여인과 같은 향기, 같은 색의 머리칼을 가진 소녀. 이 소녀를 자신의 여인이라 생각하며 소녀의 머리칼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여인을 느껴보겠노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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