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10화 (10/83)

제 10화 - 내가 그 분의...지어미이질 않는가.

입궁을 한 지 석 달이 흘렀다. 날씨는 제법 후덥지근해져 물씬 여름 내음내가 났다. 윤과 첫 동침을 한 이후로 서화가 임금을 마주하는 일은 매일 아침 대왕대비전에 문후를 드리러 갈 때와 한 달에 한 번. 임금이 '합방'이라는 거짓명목 아래 교태전을 찾을 때였다.

그리고 오늘이 그 한 달에 한 번 이루어지는 '합방일'이었다.

드르륵-.

윤의 등장에 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숙였다.

" ......"

" 중전. 과인이 왔소-."

다른 때와 다르게 임금의 목소리가 우렁차고 들떠보였다.

" 내가 왔단 말이오."

" ......"

" 나를 오래 기다리시었소? 우리 중전께 과인이 못할 짓을 했구려-."

윤이 서화에게 다가오며 우악스럽게 그녀를 그의 품 안으로 끌어 당겼다.

"저...전하!"

깜짝놀란 서화가 숨을 헙-하고 들이마셨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목석처럼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런데...

난생 처음 느껴보는 지아비의 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날서림 때문에 그의 몸도 차디 찰 것이라 생각했던 서화의 생각과는 달리 따뜻하다 못해 포근하기까지 했다.

곤룡포와 당의가 맞닿아 윤이 숨을 고를 때마다 상체가 부풀어올랐다 가라앉았다 반복하면서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났다. 서화의 어깨 너머로 들리는 윤의 숨소리. 그 숨결이 서화의 목 뒷덜미를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간지럽혔다.

" 중전께선...행복하시오?"

윤이 나지막히 말했다.

" 중전께선...이렇게 사는 것이...정녕 행복하냔 말이오..."

" ...전하..."

" 과인은...나는 말이오...ㄴ..ㅏ..ㄴ.."

윤은 그대로 스르르 무너지듯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임 상선의 도움을 받아 임금을 바로 눕힌 뒤 그의 곁에 앉아 지그시 바라보는 서화. 윤에게서 코 끝이 찡할만큼 강한 술냄새가 났다.

호롱불빛 탓인걸까. 윤의 굳게 감긴 눈 언저리가 유달리 촉촉해 보이는 것이.

" ...가지 말거라...설아..."

곤히 잠든 줄 알았던 윤의 입술 틈새로 자그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서화는 짐작을 하고 말았다. 아니, 알아차리고 말았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 이름을.

잠결에 누군가를 애타게 붙잡는 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에 큰 돌멩이 하나가 꽉 들어찬 것처럼 갑갑해졌다.

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 상궁과 함께 있던 임 상선을 발견하고선 서화는 운을 뗐다.

" 임 상선."

" 예, 중전마마."

그가 허리를 구부리며 서화의 부름에 답했다.

" 내 오늘은 고뿔기운이 있는지 머리가 조금 무거운 듯 하여 전하를 뫼시기 힘이 들 것 같네. 전하께선 이미 침수를 드시었고 나는 잠시 후원을 거닐까 하는데 나와 함께 가겠는가."

서화의 말에 임 상선의 낯빛에 당혹감이 순간 서렸다 사라졌다.

그러나 마치 이 순간이 올 줄 알았던 것처럼. 그러나 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중무장을 하고선 예- 중전마마 라고 답하며 따라 나섰다.

후원에 나온지 한 시각이 흘렀건만 서화는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지 어두컴컴한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 중전마마. 밤이 깊었사옵니다. 이제 교태전으로 다시 발걸음을 하심이..."

임 상선은 중전마마의 옥체가 상할까 걱정이 되었다.

" 임 상선."

" 예, 중전마마."

" 그 분은...어떠신 분이었는가."

" ..."

임 상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언젠가 올 줄 알았던 순간이었다.

" 나는...몰랐네...참말로 몰랐어. 그저...보이는 것이 다인줄로만...알았다네."

" 중전마마..."

" 나는 그 분께서 사약을 드시고 사사되었다고 들었기에... 그 분의 생전에도 전하와의 사이는 무척 소원했다고 들어 나는 그저...그런줄로만 알았다네."

" 중전마마..."

"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겐가. 궁 안의 떠도는 소문들을 귀동냥하여 어름어름... 짐작은 하네만...그래도 전하가 태어나셨을 때부터 옆에서 모셔온 측근인 자네에게서 확실하게 듣고 싶네."

" 하지만 중전마마..."

" 이건 명이 아니라 내 청일세. 부디 내 청을 거절치 말아주게."

서화의 간절한 목소리에 임 상선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고 말았다.

" 전하께서는... 선대 중전마마를 많이 흠모하셨나이다. 선대 중전마마께서 삼간택에 오르셨을 때 이례적으로 전하께서 직접 참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 때부터 마음에 두고 계셨사옵니다."

" 그러하였는가..."

" 예... 전하께서 자전(대비) 마마께 직접 찾아가시어 그 분을 교태전의 주인으로 삼고 싶다 하셨나이다."

" 그러하셨던 두 분께선...어찌하여...그리 소원해지신 것인가. 어찌하여..."

" 중전마마...이 이상은 말씀은 차마 아뢰기가...차라리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더 이상 도무지 운을 떼기가 어려웠던 듯 임 상선은 차가운 흙바닥에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의 주인을 위해 말 한 마디조차 신중을 귀하는 임 상선의 충심이 서화는 기특했다. 하지만 자신도 알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존귀하신 그분의 눈에서 옥루가 비친 까닭을..

" 임 상선. 나는 그저...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을 뿐이네...그리 하면...전하의 어심의 슬픔을...위로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네. 허울 뿐이라 하여도...명색에 내가 그 분의...지어미이질 않는가."

지어미... 자신의 입에서 낯선 단어가 튀어나오자 서화가 씁쓸히 웃어보였다. 하지만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 임 상선은 그런 서화의 얼굴을 감히 올려다 볼 엄두 같은 건 내지도 못한 채 떨림이 올곧이 전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 중전마마.. 이 이야기는 훗날, 때가 되면 전하께 들으시는 것이 나을 듯 하옵니다. 소인은 그저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따를 뿐, 전하의 성심과 성의를  헤아리고 알아차리기엔 너무도 모자라고 어리석나이다."

" ..."

" 반드시 그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옵소서."

' 전하께선 언젠가 중전마마께 마음을 여시고 다가가시리라 소인은 그리 굳게 믿고 있사옵니다. 중전마마의 어질고 온화하신 성품에 전하께서도 빠져드시게 될 날이 올 것이오니 부디 전하를 기다려 주시옵소서, 중전마마.'

결코 들리지 않을 안타까움 섞인 속말을 임 상선은 하염없이 서화를 향해 읊조렸다.

***

그 시각-.

" 아버님!!! 저를 중전으로 만들어주시겠다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 귀인마마. 고정하시옵소서."

" 오늘도 전하께선 또 교태전으로 드셨다고 합니다. 제 처소엔 아직 한 번도 발걸음 하신 적이 없으신데 말입니다. 이건 전하께서 제가 귀인이기 때문에 저를 하찮게 보시는 처사가 아닙니까!"

성난 여인의 언성에 쩔쩔매며 이를 말리는 사내.

이는 바로 좌의정 최경주와 그의 딸, 최 귀인이었다.

" 허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무늬만 합방이라 합니다."

" 파릇한 남녀가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자고 밤을 지새우면 정이 싹트는 법입니다. 중전자리도 빼앗긴 마당에 만약 그년이 원자 생산이라도 하면 저는 평생 뒷방 신세가 아닙니까, 아버님!!"

최 귀인이 악에 받쳐 두 눈에 시뻘건 핏줄이 서도록 소리를 질렀다.

" 이럴 때일수록 더욱 의연하게 계셔야 합니다, 귀인마마."

" 아버님! 전 이렇게는 못 삽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낫습니다!"

" 이 아비가 절대 그리 되게 만들진 않을 것입니다."

" 그럼 무슨 방도라도 있단 말입니까?"

순간, 최 귀인의 눈빛이 번뜩이며 좌의정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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