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화 - 하나를 내어주면 하나를 가져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
금침 위에 누운 서화는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낯선 이의 인기척 때문인지, 아니면 가슴을 옥죄고 허물어트려버리는 윤의 말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바스락-.
누워있노라니 두통의 정도가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아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서화의 움직임에 금침 이불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서화의 오른편에 누워 자고 있는 사내는 깊이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만이 방안에 잔잔히 울려퍼졌다.
" 후우..."
아까부터 가슴 언저리를 꽉 막고 숨통을 조아대던 갑갑함을 한숨과 뒤섞어 나지막히 내쉬었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 바라보게 된 사내의 얼굴.
어두운 방 안에서 얼핏설핏 보이는 윤의 얼굴의 윤곽선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와 대조되는 서화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그의 눈동자, 불그스름한 호선형의 입술에서 나오는 등골을 시리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
'과인에겐...이미 정인이 있소'
윤이 했던 말을 속으로 되내어보는 서화.
'정인이라...전하께서 사모하는 여인이 있으셨던 것인가. 헌데 어째서 그 분과 혼인을 하지 않으신걸까...'
자신은 임금이 조정의 대신들을 다룰 장기말이 되어줄 만큼의 권세가 있는 가문의 여식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인가......
'그저...교태전에 들어앉아 계속 비워져있던 빈 중궁전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대소 신료들의 입을 막아주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이가 필요했던 것이었구나.'
윤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님에도 그가 '지아비'라는 까닭에서인지 마음이 시큰거리는 것이 씁쓸해졌다. 부부의 연은 하늘에서 맺어준다고 들었다. 자신의 아비만 보아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가하지 않으시고 평생 홀로 어머니만을 그리워하며 살아오신 자신의 아비를 보며 서화도 그런 지고지순한 인연을 만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인으로써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 중전.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만 눈물이 날까.
서화는 밤새도록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
다음 날 아침, 서화는 윤과 함께 대왕대비전으로 문후인사를 드리러 향했다.
두 사람이 초야를 치뤘다는 소식을 이미 진작에 접한 대왕대비와 대비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이들을 맞이했다.
" 어서오세요, 주상. 그리고 중전."
" 아침 문후를 드리옵니다."
윤과 함께 다소곳이 절을 하는 서화를 대왕대비는 연신 인자한 웃음으로 어여쁘게 바라보았다.
" 이리 아름다운 여인이 우리 주상의 배필이라니. 이 할미는 그저 보기만 하여도 배가 부르오."
" 저도 그러하옵니다. 어여쁜 꽃 한송이가 궁궐을 훤하게 밝혀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 중전께서는 부디 튼튼한 원자를 생산하시어 나라의 기강을 굳건하게 하시고 이 할미의 숙원을 풀어주세요. 주상과 중전을 닮은 원자를 이 두 손에 안아보는 것이 이 늙은이의 단 하나뿐인 소원입니다."
대왕대비와 대비의 덕담에 양 볼이 발그레해진 서화. 부끄러웠다. 그러나 윤과 서화의 속사정을 모르는 두 웃전 어른들의 원자 생산에 대한 말씀에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렇게 아침 문후를 올리고 나온 두 사람. 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강녕전으로 갔다. 홀로 덩그러니 남은 서화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보니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르른 하늘과 궁궐의 기와였다. 첩첩 둘러싸인 궁궐 안에서 옥에 갇힌 것처럼...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니 가슴이 답답했다.
" 중전마마. 괜찮으시옵니까."
한 상궁이 서화에게 말했다.
" 괜찮네...다만 이곳은 너무 답답하여 탁 트인 넓은 곳을 바라보고 싶구나."
" 허면 아미산(峨嵋山)에 올라가 보시겠습니까."
" 아미산...?"
" 예. 교태전 뒤에 있는 가산이옵니다. 그곳에 오르시면 이곳보다는 더 넓은 전경을 바라보실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 그럼 그리 가자꾸나."
아미산으로 향하는 서화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아미산에 오르니 경복궁이 자신의 발밑에 와 있었다. 맑아보이는 하얀색의 당의와 금직이 화려하게 박힌 남색 스란치마가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자 서화의 숨통도 트이는 듯 했다.
" 이제서야 살 것 같구나."
서화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이 맑은 공기를 자신의 몸 안에 가득 담으려 애썼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서화는 삼간택에서 귀인의 첩지를 받은 두 여인을 맞이하기 위해 교태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
" 중전마마. 귀인 최씨, 귀인 조씨 들었사옵니다."
" 들라하게."
드르륵-.
국혼을 치루기 전까지 별당에서 서화처럼 궁중예법을 익힌 두 여인이 교태전에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귀인 조씨의 얼굴엔 서화를 보자마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반면 모난 얼굴을 하고 있는 귀인 최씨. 그 까닭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 넘어가는 서화였다.
" 어서들 오시게."
" 중전마마.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 중전마마. 중궁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애써 굳은 얼굴을 감춰가며 자신의 중전 책봉을 축하하는 귀인 최씨. 최 귀인의 심기불편한 표정이 가감없이 드러났다. 그런 이가 거북하지만 그런 귀인 최씨에게 서화가 웃으며 말했다.
" 이리 축하해주니 고맙네."
' 벌써부터 나도 능구렁이가 되어가는구나.'
" 두 귀인께는 성심을 다해 전하를 보필해 주세요. 그것이 우리 내명부의 소임임을 망각해선 아니될 것입니다."
" 명심하겠사옵니다, 중전마마."
" 명심하겠사옵니다, 중전마마."
교태전에 앉아있기 불편했던지 귀인 최씨가 다과상을 들인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미령하다며 자리를 떴다. 그러자 귀인 조씨가 해사한 얼굴로 더욱 살갑게 서화에게 말을 건넸다.
" 중전마마."
" 인경아."
" 중전마마! 소첩을 그리 부르시면...!"
" 우린 벗이잖아. 이 궁 안에서 내가 믿고 의지할 이는 너밖에 없어, 인경아. 그러니 우리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서로 품계 따지지 말고 편하게 대하자. 응?"
" 그러다 한 상궁이 알면..."
" 그러니 우리 둘이 있을 때라고 말하지 않어? 너도 편하게 내 이름으로 불러줘."
' 더 이상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어...'
서화의 부잇해 보이는 표정에 인경은 더 이상 군소리 않고 서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주상전하와 초야를 치뤘다 들었어. 나는 아직 전하를 제대로 뵌 적이 없어서..."
" ...어려우신 분이야."
" 많이 무서우셔...?"
" ......."
" 어휴... 난 이제 궁궐 안에서 꼼짝없이 죽겠네. 지아비라고는 하지만 눈길 한 번 못 맞춰본 전하에 최 귀인의 살벌한 눈길에...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 대비마마는 찾아뵈었어? "
" 응. 그런데 난 대비마마는 어렸을 적 두어번 뵌 것이 다인지라 대비마마를 알현하는 것이 어렵더라. 사실 아버님은 어떻게든 나와 대비마마를 이용해 조정에서의 세력을 키우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시지만 나는...그런 아버님이 싫어."
인경이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자 서화도 문득 자신의 아비가 생각이 났다. 자신의 혼롓날 오랜만에 본 아버지.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하였지만 그새 하얀 눈이 머리에 소복히 쌓이고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패인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 아버님......'
홀로 계실 아비 걱정에 당장 궁궐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서화. 그나마 이 삭막한 궁궐에서 조금이나마 의지할 수 있는 벗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며 자신을 위안했다. 비록 아비와 이별하는 것은 궁궐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자신이 시집을 가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던 것이라며 마음을 다독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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