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8화 (8/83)

제 8화 - 합궁

" 전하...소인이 감히 한 말씀 아뢰겠나이다."

임 상선이 이제 막 기침한 윤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 듣기 싫으니 아뢰지 말거라. 보나마나 지난 밤에 교태전에 발걸음하지 아니한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할 것이 아니더냐."

윤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 소인, 비록 미천하고 세상 이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오나 지아비가 지어미와의 초야를 뒤로하고 다른 여인을 들였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더욱이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지존, 여느 사내들과는 다르시지 않사옵니까. 이 막막한 궁궐에 홀로 들어와 전하의 지어미가 되신 중전마마를 외면하시고 다른 여인을 침소로 불러들이시다니요. 이것은 중전마마와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욕보이시는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시어 지금이라도 교태전에 걸음하시어..."

" 내 듣기 싫다 하지 않았더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 물러가거라!!"

윤이 언성을 높이며 침상을 손으로 탁 내려치며 말했다. 이에 임 상선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선 뒤로 걸음하여 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내 마음이 아직도 이리 아픈데 어떻게 다른 여인을 내 지어미로 삼고 품을 수 있단 말이냐...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이가 생생하게 기억나고 눈을 뜨면 미치도록 그립단 말이다..."

윤은 가슴을 적시며 스며드는 과거의 기억에 고통스러운 듯 두 눈을 감은 채 홀로 중얼거렸다.

***

"무어라. 다시 말해 보거라."

"지난 밤...전하께서 교태전에 발걸음을 아니하시고 강녕전에 여인을 불러들이ㅅ..."

쾅.

대왕대비가 강씨가 서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지난 밤의 일을 고하는 김 상궁에게 말했다.

" 지금 당장 주상전하를 뫼시고 오너라. 혹여라도 아니오신다 하시거든 내가 직접 가겠다 전하시게."

" 예, 대왕대비 마마."

김 상궁이 대왕대비전을 빠져나가자 대왕대비가 앞에 앉아있던 대비에게 말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전하께서 중궁을 저리 소박놓으셨으니. 중전께선 아직 교태전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신게요?"

"송구하옵니다, 대왕대비마마. 이것이 모두 다 제 불찰이옵니다...중전께서는 주상께서 직접 발걸음 하실 때까지 아니나온다 하였다고 하옵니다.."

" 허어...이게 대체 무슨 망극한 일이란 말이오!"

대왕대비와 대비의 얼굴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얼룩졌다. 세월이 지나면 마음의 기억도 옅어지고 흐려지겠거니 하였다. 윤의 옆에 아름다운 꽃 한 떨기를 가져다 놓으면 그도 이에 취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첫 걸음부터가 난관이다.

" 대왕대비 마마. 주상전하 납시었사옵니다!"

" 어서 뫼시게!"

드르륵-.

문이 열리고 윤이 대왕대비전 처소 안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이자 자식. 세월의 흐름이 만연히 드러나는 두 여인의 얼굴엔 잠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안타까움이 스쳤다.

" 할마마마, 어마마마. 소인 문후 여쭈옵니다."

대왕대비 강씨의 전언을 가지고 길을 나서던 김 상궁은 얼마 안가 대왕대비 처소로 오고 있던 윤을 발견하였다. 너무도 당당히 홀로 문안인사를 왔다는 그의 말에 대왕대비가 더욱 엄한 얼굴로 윤을 나무랐다.

" 주상! 이 할미가 아는 것이 정녕 참이오? 주상께서 중전과 초야를 치루지 아니하시었다는 것이?"

" 그렇사옵니다."

" 대체 이 일의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그리 큰 잘못을 저지르시었소! 주상과 중전의 혼례는 그저 남녀의 혼례가 아닙니다. 이는 나라의 운명이 달린 국혼이란 말입니다! 사가를 떠나 적적할 중전을 찾아 위로하고 함께 부부의 도리를 다하진 못할망정 이런 해괴망측한 일을 벌이다니요!"

" 할마마마, 고정하시옵소서."

" 지금 내가 고정하게 생겼습니까! 이 할미의 초상을 치루고 싶거든 계속 그렇게 중전을 외면하세요. 주상께서 교태전에 발걸음하시어 초야를 치루실 때까지 수라를 들이지 말라 할 것입니다!"

" 어마마마!"

" 할마마마!"

대왕대비 강씨의 강수에 대비 조씨와 윤이 나서서 말리려 하였으나 대왕대비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대왕대비 강씨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윤은 또 다시 두통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어디로 뫼실까요, 전하."

겸사복 시운이 물었다.

"천월각으로 가겠다."

" 예, 전하."

수도 없이 걸음했던 곳. 사무치는 그리움에 맨 정신으로 도저히 현실을 감당할 수 없을 때면 이곳으로 왔다. 그리하면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싶어 걸음한 천월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아름다웠다. 두 사람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 윤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의 이성 끝자락을 부여잡는 현실.

"임금의 자리가...너무도 버겁구나."

"......."

"할마마마께...불효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되겠지..."

"......."

"임금의 자리란...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다...그러나 정작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아무것도 없구나...허울 좋은 빈 껍데기일 뿐이야..."

"......."

윤의 말에 시운은 그저 묵묵히 그의 곁을 지킬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밤...교태전에 들겠다."

윤이 교태전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제서야 시운은 놀란 눈으로 윤을 바라보았다.

"그것이...임금의 도리라면...해야지.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까진 내어주지 않을 것이야."

그 누구에게도 말이다.

윤은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이 되어서야 천월각을 떠나 교태전으로 향했다.

그 시각-

교태전은 임금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였다. 그러나 정작 서화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주상전하 납시오-"

윤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에 서화는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나 그를 맞이하였다.

드르륵-.

"......."

"......."

임금과 중전이 합궁을 하는 동온돌.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 말이 없다.

한참을 서 있던 두 사람의 적막을 먼저 깬 것은 다름아닌 윤이었다.

" 다리 안 아프시오? 머리에 얹은 것도 많아 무거울텐데 앉으시오."

" 예, 전하."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또 그렇게 한참동안 아무말이 없다. 목이 저리고 아플텐데도 신음소리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다소곳이 앉아있는 서화의 모습이 그제서야 윤의 시야에 잡혔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여인. 앞으로 자신의 사람으로 삼고 평생을 함께해야 할 인연. 백옥같은 피부에 붉게 물들인 입술이 앙증맞아 보였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녀에겐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단 한 치도 없기에... 그녀에게 지아비로써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미안하면서도 그녀의 처지가 처음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 내가 벗겨드리리다."

윤이 서탁을 한 편으로 밀어내고 서화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흠칫하던 서화는 부끄러운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입을 앙 다물었다.

하나 둘씩 비녀와 장신구들이 떨어져 나갔다. 거대한 무게의 대수머리로부터 벗어날때쯤, 윤이 문 바깥의 상궁들에게 명하였다.

" 모두 물러가라."

" 하오나 전하, 그것은..."

윤의 말에 한 상궁이 놀라 말하였다.

" 물러가라 하였다. 오늘은 중전과 단 둘이서 보낼 것이니 모두 물러가라."

"예, 전하."

어쩔 수 없이 윤의 어명으로 모두 물러간 뒤, 금침 위에 마주앉아 윤이 서화에게 말하였다.

"지난 밤, 교태전에 들지 않은 과인을 원망하시오?"

"......."

"원망스럽겠지. 그럴게야. 하지만 과인은 앞으로 중전에게 더한 일을 더욱 많이 하게 될 것이오."

윤의 말에 서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과인에겐...이미 정인이 있소."

"..."

"해서...그 어떤 이에게도 과인은...나의 마음을 내어줄 수가 없소."

"..."

"그렇기 때문에...과인은...중전을 안을 수 없소이다."

"..!"

서화가 깜짝 놀라 윤을 쳐다보았다. 충격의 연속에 정신이 혼미해져옴을 느꼈다.

"중전은 이 나라의 국모이자 나와 평생 함께 해야 하는 지어미요. 그렇다고 침수드는 여인들처럼 중전에게 그런 수모를 안겨줄 순 없소. 종묘사직을 생각하면 후사를 이어야 함이 마땅하나 나는 중전에게 여인의 기쁨을 드릴 수도 없소이다. 허나, 중전으로써의 예우는 해드리지. 그러니 중전께서도 나에게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마시오."

윤이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가락을 베었다.

"전하...!"

서화가 놀라 허둥거리자 윤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란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선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오는 핏방울을 금침 위로 떨어뜨렸다.

"이렇게 하면 상궁들도 우리가 합궁을 했을 거라 생각할 것이오. 그럼 대왕대비마마와 대비마마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내가 여인을 자주 들인다는 것은 모두 다 알 터이니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중전도 편하게 교태전에서 지내면 되오. 과인은 그저 가끔씩 이곳에 들러 합궁하는 척 하고선 날이 밝기 전에 다시 강녕전으로 돌아갈 것이니 그리 아시오."

가시밭길 같은 인생에 쓴 물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서화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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